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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딸랑 책 한 페이지 넘기듯 가볍게 말하지 마
자고로
종이 한 장 때문에 生의 페이지가 확 달라졌던
시비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났다는데
엄청난 무게중심이 실려 있는 것
두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착착 갈리는
경계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
경계의 빛나는 칼날은
행여 자신의 몸이 녹슬까
늘 철저히 경계하며
새파랗게 날 벼리고 있어
어떤 두꺼운 전통이나 딱딱한 관습에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거든
나,
너무 가벼워서 안 보이는 작은 움직임에도
휙휙 쇳바람을 일으키며 징징 울어대는
저 날카로운 종이칼의
절벽에 서 보았다, 아니

**************************************

종이 한 장 차이와
종이 한 장 때문에

시를 논리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다.
그건 비평가들의 몫으로 넘겨주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시인의 몫으로 남겨주고
나는 읽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에
마음을 맡기고 있으면 그만이다.

마음이 사랑에서 미움으로 돌아서는 것도
종이 한 장 차이라 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도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한다.
너무 쉽게 단정짓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기껏 의견이라고 말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종이 한 장 때문에 절벽에 서보았다고 한다.
아, 상상의 지평을 넓혀 사유의 세계로 빠질 것도 없이
이 말 한 마디로 나는 여러가지 기억들을 떠올린다.

어려서 보았던 엄마와 아빠의 합의이혼서.
물론 진짜 사회적인 이별은 내 나이 스물에 이루어졌지만
나는 그 종이를 살 떨리게 바라본 기억이 난다.
어린 날 보고 도장 찍게 인주 빌려오라고 한 이가
바로 울 엄마였으니까...그건 분명 절벽이었다.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이가 사업에 망해
빚더미에 올라앉았을 때
전세 든 이의 채권자가 우리에게 보낸
전세금 반환 소송 청구서도 떠오른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싸움에 말려들어
반 년이나 재판정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난다.
억울하다거나 기막히다는 감정보다
돈에 의해 단절된 마음의 절벽을 보았던 아뜩한 시간이었다.
판사의 사무적인 얼굴과
풀 죽어서도 불투명한 미래를 제시하는 세입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나 답답했다.
종이 한 장 때문에...

친구네 가게를 인수했을 때의 계약서
믿음과 체면을 내세워 인수한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도장 찍힌 계약서는 이미 바로 전의 삶과 후의 삶을
엄청난 차이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예리한 칼날에 베이고 말았다.
미움이나 원망조차 사라진 지금에도
서로에게서 드러난 못난 인간의 면면들 때문에
시니컬해지거나 허허로워지곤 하니 말이다.
그것도 종이 한 장 때문이라 해야 하나?

이곳에 온 일도 그렇다.
남편과 서로의 아픈 곳을 찔러가며 싸워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달리면서
그래도 그래도...어쩔 수 없어...자포자기하듯이
그래도 멍청한 성품대로 무지개빛 희망에 대한 미련은
한귀퉁이에 심어두고 이민 절차를 밟고 받은 여권 하나.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거울 속의 나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일일이 냉정하게 인식하고 분석할 틈도 없이
나는 낯선 풍경 속을 질주해 간다.

참 여기선 운전면허증이 주민증이나 같다고 한다.
그게 있어야 취직도 할 수 있고
그게 있어야 어디에서건 이곳 주민임을 인정해 준다.
세상에나 운전면허증이?
주민등록증이?
나라는 존재보다 더 확실한 신분보증서이며
명함이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매겨준다.

경제적인 손실이나
사망통지서 같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보여주는 종이가 아니어도
명함 한 장 앞에서도 절벽을 자주 보곤 한다.
너와 나의 거리가 아득함을 느끼곤 한다.

감성적으로 가장 아뜩한 경계는
"그만 만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런 절교의 편지일까? 그게 종이칼의 절벽인가?
차라리 안보았으면 싶은, 몰랐으면 하는...
아니

여전히 나는
"사이"라던가 "틈"이라는 말이 편안하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는 말을 믿고 싶다.
그렇담 절벽 또한 틈을 전제로 하지 않던가?
절벽을 타고오르듯

어둠은 빛의 상대어이고
절벽이 있으면
다리라던가 계곡이라던가 내려가는 길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나 죽을 때
절대로 구경할 걱정이 없는 게
사망진단서이므로

지금이라도 일어나 빛을 향해
하늘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게
생명 붙은 존재의 특권 아니던가?






***** 거금도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 +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4-06-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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