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잘 가시게
내가 그와 우정을 맺은 것은 무지 가난하던 신학생 시절이었다. 때로는 버스토큰이 없어서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미아리에서 창동까지 걸어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서로 가난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내가 나아서 으레이 차비는 내가 내곤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죽음의 사선을 오르내릴 때 그는 내 병상에 찾아와서 기도해주곤 했었다. 흑산도를 가던 날 우리는 나란히 여객선에 앉아 서로의 아픔을 얘기하고 부부에게도 말하지 못할 서로의 깊은 아픔을 이야기하던 친구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지만, 그는 언제나 느긋한 사람, “강목사, 궁금한 것이 있는데, 강목사도 부부싸움 할 때 화내시오?”라는 말에 “나는 생각해보고 성질내.”하던 친구 강임춘목사, 아무리 봐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생명이 꺼져가던 그에게 “강목사, 나 밖에 이 말은 할 사람이 없소. 마지막 죽을 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십자가 든든히 붙드시오. 하늘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온 지 하루 만에 그는 다시는 돌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의 나이 54세, 내가 아는 어떤 건강한 90세 장로님의 나이까지 산다면 앞으로도 36년을 더 살아야 될 사람, 그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가난하게 살다 집한 칸 남겨 둔 것이 없이 많은 빚과 처자식을 남겨둔 체 쓸쓸히 이렇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빨리 집으로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던 지친 몸이었지만 친구가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어 원당 명지대병원에서 발인예배를 마친 후 벽제화장터로 상여행렬과 같이 갔다. 도착한지 약 2시간 만에 그와 우리를 가로막은 유리창 너머로 친구의 시신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앞에 안치되고 마지막 고별 예배를 드릴 때 유난히 그의 둘 째 아들은 흐느껴 울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친구의 시신, 흐느끼는 아들, 우두커니 바라보는 유족들, 나는 지난날 그와의 우정과 내가 겪어온 슬픈 날들을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안경사이로 손을 넣어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일찍이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4) 만고불변의 진리를 나는 지금 친구를 통해 실제로 보고 있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 앞에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그래, 나도 저 자리에 눕겠지. 쉬이 그런 날이 오겠지.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눈물꽃 깔고 흐느끼는 날이 오겠지. 아름답던 시절 꽃잎 지기 전에 이제부터 하루하루 나를 성찰하며 성실히 살리라. 빗물처럼 흐르던 눈물을 훔치고 마음을 가다듬고 보니 어느새 고별 예배는 끝나고 나는 소중한 시집[詩集] 한권을 잃은 자처럼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화장터 계단을 흘러내려가는 분수대 물을 따라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내려오며 속으로 이런 말을 되뇌었다. 그래, 서러이 살아온 고통스런 날을 접고 영원히 쉬고 싶다고 하던 강목사, 잘 가시게. 편히 쉬시게.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것을… 나는 오늘 허전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동안 소식이 뜸하셔서 염려하던 차
목사님 친구분을 잃으셨군요
저는 아마 소설이라도 한권 쓰시나 했읍죠.
그렇습니다.
죽음앞에서 의연할 수 있다는게 힘든 일이죠.
더구나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신학공부에
몰두하셨다니 얼마나 슬펐겠어요
많은 기도와 기원으로 마음의 위안을 가지시고
늘 해오신 것처럼 좋은시 한 수 홈피에서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