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비 오는 어느 날 이삿짐을 철선에 싣고 처음 발을 디뎌보는 거금도 금산을 향했다. 이사를 무사히 마치고 어머니께서는 우리 두 부부만을 남겨두고 광주 집으로 가시고 그때부터 금산생활은 시작되었다.
가까운 섬이지만 배 없이는 우리 집을 갈 수 없는 것에 섬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낯선 곳에 와서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처음 해 보면서 나의 전공 교과가 아닌 인문지리교과를 맡아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인문지리 교과를 저녁 12시넘게 연구하여 다음날 가르치고 또 연구하여 다음날 가르치고 하며 이러한 일들이 거듭되면서 시간은 흘렀다.
학생들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도가 못 이루어져서 항상 죄스러웠다.
학생들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저주스러운 마음으로 3학년2반 담임을 맡아 교육 했었다.
그 해 음력 칠월칠석날 어머니께서 절에 다녀오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가정적으로 어려운 해였고 학교생활도 어려운 나로서는 일생 제일 어려운 해였었다.
그 다음해 2학년 담임을 했었고 그 다음해는 주임교사를 하면서 담임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986년 2월 이삿짐을 배에 싣고 금산을 떠나오면서, 추억 어린 적대봉 갈대ㆍ송광암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바다를 멀리하고 도화고등학교로 전근되어 왔었다.
그 뒤 교직생활이 어언 20여년이 흘러 지금에 왔는데, 그 동안 금산종합고등학교는 나에게 떳떳하지 못한 추억이었으나 교장으로 승진되어 다시 금산을 찾게 되어 감회는 깊고 새로웠다.
그러나 당당하게 교직생활을 못했던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고 금산중학교 교장직을 최선을 다하여 노력했었다. 체육관도 건립하고 금산에 태어나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고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었다.
한 때는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나 위로도 받고 싶었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2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현재 목포교육청 교육과장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내마음속에는 금산이란 지역을 잊을 수 없고 잊어지지 않았다. 고흥에서 15년 금산에서 5년이란 세월이 나의역사 몇 페이지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항상 궁금했던 것은 내가 잘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나의 제자들이 어른이 되어 자녀들을 낳고 어디서 얼마만큼 잘 살고 있을까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간이 흘렀다. 내 마음은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 제자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에서 제자들이 만나자는 소식에 나는 너무도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떳떳하지 못한 나의 과거 제자들과 지냈던 학교생활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였다. 좀 더 열심히 우리 제자들을 위해서 보람 있게 지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앞선다.
지금 나는 이 자리가 너무 감명 깊고 교사의 보람을 제삼 느껴보며 즐거움에 벅차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항상 즐거움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군사부일체라는 말 즉 임금님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같다는 뜻입니다.
여러 제자 여러분 젊고 찬란한 꿈을 실천으로 남은 앞으로의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장식해 주기 바랍니다.
제자들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2006. 3. 18. 오후 7시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목포교육청 교육과장 배 병 채
잘 내려가셨는지 전화도 못드렸습니다.
잘 내려 가셨는지요?
선생님
벌써스물두해가 지났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이신 선생님을 뵙고
건강한 모습을 하고 계셔서 감사할 다름이었죠
또한 먼길을 오시고 많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함께 자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젠 미안해하지마시고 늘 좋은것만 기억해주세요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을 저희가 잘 아니까요.
선생님
지금은 부족한게 많지만 복된 인생이 되기위해
늘 꿈꾸며 즐겁게 살아가렵니다.
이번 모임이 더 좋응 만남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윤미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