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두려운 일들이 꼭 있다.
근데 그 두려움이 때로는 그냥 그 대로 두려움으로,
아님 설레임으로 바뀌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
.......
어렷을 적 내 또래 애들은 한결같이 파상재나 새진몬당으로 소를 먹이러 갔다.
우리 소가 없던 진짜 어릴때는 큰집의 소를 먹이러 다녔고,
둘째아들로 저금난 울 아버지가 소를 샀을때는
우리 소를 먹이러 파상재, 새진몬당으로 갔었다.
새진몬당이나 파상재의 편편한 곳은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아래로 바다가 보이고, 시원한 바람에 노는 것은 마냥 재미 있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 얘들은
그런 새진몬당 같은 곳에다 club House를 지어놓고 결혼식도 하고 party도하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거 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엄청 좋은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개작대기 놀이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복싱도 하고,
그러다가 목이마르면 새진몬당 아래에 있는 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그 물맛은 얼마나 달았든지. 왜 돈주고 사먹는 물에서도 그 맛이 나오지 않는걸까.
하루는 파상재에서 감재를 구워먹었나보다. 기억은 선명치 않지만...
불이 지펴쪘었고 그불이 바짝 마른 잔듸를 타고 흘더니 그만 산에 불이나버렸다.
솔나무가지를 꺽어다가 꺼도꺼도 불은 우리가 끄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 털은 불에 그스러지고, 연기에 연신 콜록콜록 거리고,
불은 나무를 활활타오르고, 연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는 거 같았다.
하다못해 "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게 되고,
동네 청년들, 어르신들 여기 저기서 몰려들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드디어,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고 해는 저물어가고, 산은 온퉁 시커멓게 타불었고,
소는 어디있는지 모르겠고,
동네 어르신들 뭐라고 뭐라고 나무라는 소리는 들리는 데, 지금 기억나는 건 그 때 느꼈던
두려움 뿐이다.
지금도 그 두려움이 좀 남아있는 거 같다. 그래서, 지금도 보이 스카웃에서 켐프를 가면
맨 나중에 오줌을 싸서 불끄는 사람은 나다.
내가 미국와서도 그것을 백인들한테 보여 주었더니만 배를 잡고 웃는 걸 보았다.
우리 어릴때는 다 이렇게 불을 껏는데....
...............
...............
두려움이 설레임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무슨 역마살인지 88년 올림픽이 있던 해이다.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서울 발 LA행 Northwest비행기를 탔건만,
그 13시간 동안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당시엔 유학을 허가를 받아야하는 시절이라
우여곡절 끝에 가게도 되었지만,
가방에는 두 달치 생활비에, 영어도 잘 못한데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아는 사람하나 없는 점이
이래 저래 걱정이 되고, 이 걱정이 쌓이니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비행기를 탔는데 당시에는 비행기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뜸 했던지
비행기 안에서 이리 저리 둘러봐도 한국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안았다.
갑자기 13시간을 말 한마디도 못한것은 큰 고문이었다.
LA땅은 왜 그리 넓은가? 산도 없이 세상에...
보통 LA에 도착하면 마중나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마중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막상 LA에는 왔건만 어떻게 San Diego를 찾아간다?
거기서 어떻게 짧은 영어로 San Diego를 가려면 Anaheim을 가서 거기서
San Diego로 간다는 것을 알아 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내 촌티나는 영어,
"My desitination is San Diego!"
그 날저녁 해 가 질 무렵에야 SDSU(San Diego State Uninversity)기숙사에 도착할 수 가 있었다.
그 때는 그 많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아름답던 San Diego를 설레임으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일주후 Imperial Beach로 놀러가 태평양을 바라보며, "바다 저짝은 우리 고향인디..."
하고 바라보았었다. 그 후 향수병에 걸려 6개월만에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 갔지만,
그때의 두려움은 설레임으로 바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
두려움이 아쉬움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죽음이 내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기 미국에서도 꼭 일년에 2-3번은 장례식에 가게 되지만,
한국에서 겪었던 죽음의 얘기들은 대부분 아직도 내 가슴엔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암으로 돌아가신 울 순자누나, 그 누나의 꼼꼼하고 이쁜 그 노트장이 생각난다.
"나도 중학교가면 운동화 신고, 누나처럼 영어도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했었었는데...
난 누나의 삶을 그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젊은 나이에 먼저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0년후 어느날 본 중학교 앨범에서 친구의 이름아래 (작고)라고 쓰인 것을 보면
충격에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가 않다. 이상하게 그렇다.
그런데 내 친구가 죽는 거,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죽는 거.
자주 보게 되니까 덤덤해 질 것도 같은데, 항상 두려움에서 그느낌이 아쉬움으로 남는 때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내 부모는 살아계시고,
아직 죽은 친구보다는 살아 있는 친구가 더 많다.
앞으로 반대가 될 수도 있지만...
삶이 힘들든 아니든,
삶은 그 자체로써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금산의 그 아름다운 태양이 떠오르고
개뻘을 반짝이며 넘어가는 석양이 있는 한....
출렁이는 파란 바다가
엄마의 품처럼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 있는 한,
이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돌아갈데가 있는데..
그라고, 쉬운 삶이 세상에 어디 있다요?
근데 그 두려움이 때로는 그냥 그 대로 두려움으로,
아님 설레임으로 바뀌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
.......
어렷을 적 내 또래 애들은 한결같이 파상재나 새진몬당으로 소를 먹이러 갔다.
우리 소가 없던 진짜 어릴때는 큰집의 소를 먹이러 다녔고,
둘째아들로 저금난 울 아버지가 소를 샀을때는
우리 소를 먹이러 파상재, 새진몬당으로 갔었다.
새진몬당이나 파상재의 편편한 곳은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아래로 바다가 보이고, 시원한 바람에 노는 것은 마냥 재미 있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 얘들은
그런 새진몬당 같은 곳에다 club House를 지어놓고 결혼식도 하고 party도하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거 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엄청 좋은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개작대기 놀이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복싱도 하고,
그러다가 목이마르면 새진몬당 아래에 있는 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그 물맛은 얼마나 달았든지. 왜 돈주고 사먹는 물에서도 그 맛이 나오지 않는걸까.
하루는 파상재에서 감재를 구워먹었나보다. 기억은 선명치 않지만...
불이 지펴쪘었고 그불이 바짝 마른 잔듸를 타고 흘더니 그만 산에 불이나버렸다.
솔나무가지를 꺽어다가 꺼도꺼도 불은 우리가 끄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 털은 불에 그스러지고, 연기에 연신 콜록콜록 거리고,
불은 나무를 활활타오르고, 연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는 거 같았다.
하다못해 "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게 되고,
동네 청년들, 어르신들 여기 저기서 몰려들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드디어,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고 해는 저물어가고, 산은 온퉁 시커멓게 타불었고,
소는 어디있는지 모르겠고,
동네 어르신들 뭐라고 뭐라고 나무라는 소리는 들리는 데, 지금 기억나는 건 그 때 느꼈던
두려움 뿐이다.
지금도 그 두려움이 좀 남아있는 거 같다. 그래서, 지금도 보이 스카웃에서 켐프를 가면
맨 나중에 오줌을 싸서 불끄는 사람은 나다.
내가 미국와서도 그것을 백인들한테 보여 주었더니만 배를 잡고 웃는 걸 보았다.
우리 어릴때는 다 이렇게 불을 껏는데....
...............
...............
두려움이 설레임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무슨 역마살인지 88년 올림픽이 있던 해이다.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서울 발 LA행 Northwest비행기를 탔건만,
그 13시간 동안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당시엔 유학을 허가를 받아야하는 시절이라
우여곡절 끝에 가게도 되었지만,
가방에는 두 달치 생활비에, 영어도 잘 못한데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아는 사람하나 없는 점이
이래 저래 걱정이 되고, 이 걱정이 쌓이니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비행기를 탔는데 당시에는 비행기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뜸 했던지
비행기 안에서 이리 저리 둘러봐도 한국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안았다.
갑자기 13시간을 말 한마디도 못한것은 큰 고문이었다.
LA땅은 왜 그리 넓은가? 산도 없이 세상에...
보통 LA에 도착하면 마중나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마중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막상 LA에는 왔건만 어떻게 San Diego를 찾아간다?
거기서 어떻게 짧은 영어로 San Diego를 가려면 Anaheim을 가서 거기서
San Diego로 간다는 것을 알아 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내 촌티나는 영어,
"My desitination is San Diego!"
그 날저녁 해 가 질 무렵에야 SDSU(San Diego State Uninversity)기숙사에 도착할 수 가 있었다.
그 때는 그 많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아름답던 San Diego를 설레임으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일주후 Imperial Beach로 놀러가 태평양을 바라보며, "바다 저짝은 우리 고향인디..."
하고 바라보았었다. 그 후 향수병에 걸려 6개월만에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 갔지만,
그때의 두려움은 설레임으로 바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
두려움이 아쉬움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죽음이 내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기 미국에서도 꼭 일년에 2-3번은 장례식에 가게 되지만,
한국에서 겪었던 죽음의 얘기들은 대부분 아직도 내 가슴엔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암으로 돌아가신 울 순자누나, 그 누나의 꼼꼼하고 이쁜 그 노트장이 생각난다.
"나도 중학교가면 운동화 신고, 누나처럼 영어도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했었었는데...
난 누나의 삶을 그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젊은 나이에 먼저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0년후 어느날 본 중학교 앨범에서 친구의 이름아래 (작고)라고 쓰인 것을 보면
충격에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가 않다. 이상하게 그렇다.
그런데 내 친구가 죽는 거,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죽는 거.
자주 보게 되니까 덤덤해 질 것도 같은데, 항상 두려움에서 그느낌이 아쉬움으로 남는 때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내 부모는 살아계시고,
아직 죽은 친구보다는 살아 있는 친구가 더 많다.
앞으로 반대가 될 수도 있지만...
삶이 힘들든 아니든,
삶은 그 자체로써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금산의 그 아름다운 태양이 떠오르고
개뻘을 반짝이며 넘어가는 석양이 있는 한....
출렁이는 파란 바다가
엄마의 품처럼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 있는 한,
이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돌아갈데가 있는데..
그라고, 쉬운 삶이 세상에 어디 있다요?
하느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라는 걸
새삼느끼네요.
한 편의 무협에서 서정까지 아주 잘 읽고
느꼈습니다.
금산의 아름다운 석양(특히 중촌에서 절 올라가는 재)
을 그래도 가끔은 볼 수 있는 제 자신이
무척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양현 오라버니 저에
두려움을 성토하자면
오라버니 문장 중간중간에 등장하는(끼어드는)
영어입니다.
like you(좋아한당께요), 진짜로(truth)
랄지 하는 풀이가 있으면
좋겠구만요.
제가 또 '가련한 영어수준'을
갖고 있기에
순전히 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