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세계 오픈 선수권 시리즈 중 하나인 제4회 히로시마 대회가 히로시마경기장에서 열렸다. '히로시마 원폭'이라 불렸던 내가 출전하는 경기라 언론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빠뜨리지 않고 보도했다.
당시 나이는 마흔 여덟. 레슬러로선 거의 은퇴기를 앞둔 나이였다. 그렇지만 나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경기를 며칠 앞두고 히로시마관광호텔 사장이었던 오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오키 긴타로 선생, 이번에도 '원폭 박치기' 위력을 보여 주십시요.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시간을 내주시면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전을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히로시마 팬클럽 회장이었던 그는 내가 경기를 앞두면 경기에 조금이라도 방해될까 봐 좀처럼 전화를 걸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인지 그가 전화를 걸어 나의 선전을 당부하니 난 속으로 '별일 다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이어 오다는 내 경기를 보기 위해 "특별 링 사이드석을 예약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경기 이틀을 앞두고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그때 난 충격적 사실을 전해 들었다. "오다가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건강하고 유쾌하며 늘 나의 발전과 선전을 기원했던 그의 사망이 믿기지 않았다. 갑작스런 그의 사망에 난 선장 한 명을 잃는 기분이었다. 후원회장인 오다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다. 그래서 오다는 항상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 주며 나를 뒷바라지해 줬다. 난 그에게 해 준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링에서 박치기만 보여 줬을 뿐이다.
히로시마 경기 며칠 전 오다와 전화 통화했던 것이 이승에서 마지막 대화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경기에 오다는 오지 않았지만 난 오다의 가족에게 오다의 유품을 특별석에 그대로 갖다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저승에서나마 이 경기를 봤으면 하는 심정에서다. 난 경기에 앞서 오다의 유품을 향해 그의 넋을 기리며 1분간 묵도를 올렸다.
저승에 가면 가장 만나고 싶은 오다. 그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의 팬이었다. 일본인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45년 히로시마 원폭 사건이다. 아마 일본 전·후 역사상 일본인들이 그렇게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욕스럽고 떠올리기조차 꺼려했던 일본인들이 나를 '원폭'이라 불렀고, 그 원폭이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 덕분이다.
지금 생각하면 텔레비젼 발명이 아무것도 아니듯 시간이 지나면 내가 원폭이라 불렸던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원폭이라 부른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난 조선인이 아니었던가.
히로시마에 살면서 원폭의 악몽을 가장 뼈저리게 체험했던 오다는 내가 박치기 한 방으로 서양의 거구들을 마구 쓰러뜨리는 모습에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다는 나의 원폭 박치기가 더욱 빛을 발하도록 하기 위해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선물 하나를 했다. 일명 원폭 가운이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를 상징하는 가운이 없었다. 그러나 오다가 원폭 가운을 선물하면서 난 원폭 박치기 이미지가 더욱 굳혀졌다. 이 가운 그림은 이렇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졌다. 그 잿더미 속에서 햇살이 한 건물 사이로 비친다. 그 하나뿐인 건물이 히로시마호텔이다. 히로시마가 잿더미가 됐지만 유일하게 히로시마호텔만은 폐허가 되지 않았다. 햇살은 나를 싱징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을 입고 링에 오르면 팬들은 흥분했다. "히로시마 원폭 오오키 긴타로 등장. 그가 오늘 또 어떤 박치기를 선보일지…." 난 해외 원정 때나 일본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이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링 아나운서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원폭 가운을 벗어던지고 습관처럼 이마를 만졌다. <계속>
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47]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 가운 뒤를 보여 줄 수 없어 유감이다. 비단으로 만든 이 원폭 가운은 나를 원폭 박치기 선수로 거듭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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