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인(忍)자를 가슴속 깊이 새겼다. 부처가 되는 것 같았다. `현실을 부정하지 말자. 지금 내 처지는 그저 체육관과 합숙소를 청소하고 관리하고 또 선배들 뒷바라지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만 더 힘들다. 참고 참으며 내일을 기다리겠다`고 생각하며 다짐했다.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니 청소도 즐거웠다. 청소 구역 중 유달리 흥에 겨워 쓸고 닦는 곳이 있었다. 사각의 링이다. 링은 막내가 함부로 올라갈 수 없었다. 청소라는 명목으로 올라갈 때나 가능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매트를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비록 청소할 때지만 링에 서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링을 청소할 때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1957년, 그해 여름은 유달리 더웠다. 빨래와 청소에 도가 터일 때였다. 어느덧 역도산 도장에 온 지도 5개월이 흘렀다. 선배들과 함께 경기장에 갔다.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선배들이 경기를 끝낸 후 피와 땀이 뒤범벅된 상태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때 난 결심했다. 도장의 엄격한 규율이 있어 마음대로 훈련할 수 없었지만 청소를 하면서도 훈련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사실 레슬링은 실제 경기에 나서는 것보다 훈련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래서 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단계를 거쳐야 한다. 걸음마도 하지 못하면서 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육중한 몸끼리 부딪치는 레슬링은 운동 기초 과정을 잘 따르지 않으면 큰 부상 내지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밥 짓고 빨래만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들킬 경우 스승과 선배들에게 심하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도장에 선수들이 아무도 없으면 그때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링에 올라가서 낙법도 해 보고, 뒤로 떨어져도 보았다. 독기를 품고 샌드백을 두들겼다. 고무줄로 업어치기 흉내도 냈다. 굵은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역기도 쉴 새 없이 들었다. 선수들이 힘들다며 가장 싫어한다는 웨이트트레이닝. 나는 벤치 프레스를 수백 번 들어올리며 몸을 만들었다. 몸은 고달팠지만 운동을 하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습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나도 몰라보게 몸에 근력이 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다. 운동하면서 선배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여러 번 적발돼 주의 경고를 받았다. 선배들은 내가 역도산 도장에 온 지가 수개월이 흘러서인지 크게 혼내지는 않았다. 또 내가 워낙 프로레슬링 훈련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기에 모른 척하며 넘어가는 듯했다. 선배들도 처음처럼 나를 하인 부리듯 마구 대하지 않았다. 나에게 프로레슬링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도 해 줬다. 또 가끔 진한 농담을 하면서 긴장을 풀어 주기도 했다. 선배들은 내가 금방이라도 역도산 도장을 떠날 줄 알았는데 묵묵히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 버틴 나를 새롭게 봤다며 동료처럼 대해 주었다. 선배들과 친분이 쌓여가고 있을 때 스승 역도산이 나를 부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역도산 도장에 입문한 후 스승을 본 것은 몇 번도 되지 않았다. 스승은 툭 하면 해외 원정 경기에다가 각종 행사에 참석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던 분이셨다. 더욱이 도장에서 마주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스승이 왜 부를까 걱정이 됐다. 혹시 `내가 몰래 연습한 것을 누군가 고자질해 혼내기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스승에게 갔다. 스승은 큰소리로 "김일"하고 불렀다. 정병철 기자 <계속>
사진=이호형 기자
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1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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