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인백이형의 큰형이 장가 가던 날이 생각나내요.
인백이 이 형네는 진흙 언덕 아래
자그마한 초가 집에 살았던거 갔네요.
어느 날 사람들이 그 집에 많이 모였습니다.
나는 그날 색시가 오는 같은 동네 4반 모씨가 타고 가던 가마가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그 색시는 같은 동네 4반에서 3반으로 시집을 간거죠.
지금 돌아보면 그 때는 같은 섬사람끼리, 옆마을 사람끼리도, 같은 동네 사람끼리도
결혼을 하고 그랬던 거 같습니다.
아뭏든,
네사람이 그 가마를 들고, 가마는 4반 모씨집에서 3반으로 가는데
거리는 100미터 정도 될까말까일 겁니다.
나는 그 뒤를 재밋어 따라갔더거 갔습니다. 수남이네
돌담을 지나 구부러진 그리고 계단이 깔린 인백이 형네 집엘 따라 갔는데
집도, 뜰도 조구만한데 사람들은 참 많이 와 있었습니다.
집의 건너쪽으로 무궁화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어 놨는데
그 나무가 작아 사람들에 밀려 하마트면
수남이네 뒤안으로 떨어질 뻔 하였습니다.
색시는 쪽두리에 연지 곤지를 하고
신랑은 사모 관대를 했더랬습니다.
키가 큰 인백이 큰 형이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래 삼거리로 내려와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습니다.
주석이네 화장실 옆에 있었던 그 삼거리에는 좀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연자멧돌이라고 나중에야 그 이름을 알았지만
암튼 큰 멧돌이 거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연자멧돌은 땅속으로 묻혔는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가리 똥 금엽이네 집에서 누가 장가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부가 누구 였는 지, 신부가 어디서 왔는 지도 기억이 없고,
그 날이 추웠고, 지푸라기가 널려있었고,
불을 때느라 그랫는지 마른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당옆 논시밭에 임시로 마련한 솥단지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무우 숭숭썰어서 만든 뜨끈 뜨끈한 잔치국을 먹었는데,
그 맛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은 뜨끈 뜨끈한 그 잔치국물이 생각나네요....
인백이 이 형네는 진흙 언덕 아래
자그마한 초가 집에 살았던거 갔네요.
어느 날 사람들이 그 집에 많이 모였습니다.
나는 그날 색시가 오는 같은 동네 4반 모씨가 타고 가던 가마가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그 색시는 같은 동네 4반에서 3반으로 시집을 간거죠.
지금 돌아보면 그 때는 같은 섬사람끼리, 옆마을 사람끼리도, 같은 동네 사람끼리도
결혼을 하고 그랬던 거 같습니다.
아뭏든,
네사람이 그 가마를 들고, 가마는 4반 모씨집에서 3반으로 가는데
거리는 100미터 정도 될까말까일 겁니다.
나는 그 뒤를 재밋어 따라갔더거 갔습니다. 수남이네
돌담을 지나 구부러진 그리고 계단이 깔린 인백이 형네 집엘 따라 갔는데
집도, 뜰도 조구만한데 사람들은 참 많이 와 있었습니다.
집의 건너쪽으로 무궁화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어 놨는데
그 나무가 작아 사람들에 밀려 하마트면
수남이네 뒤안으로 떨어질 뻔 하였습니다.
색시는 쪽두리에 연지 곤지를 하고
신랑은 사모 관대를 했더랬습니다.
키가 큰 인백이 큰 형이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래 삼거리로 내려와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습니다.
주석이네 화장실 옆에 있었던 그 삼거리에는 좀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연자멧돌이라고 나중에야 그 이름을 알았지만
암튼 큰 멧돌이 거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연자멧돌은 땅속으로 묻혔는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가리 똥 금엽이네 집에서 누가 장가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부가 누구 였는 지, 신부가 어디서 왔는 지도 기억이 없고,
그 날이 추웠고, 지푸라기가 널려있었고,
불을 때느라 그랫는지 마른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당옆 논시밭에 임시로 마련한 솥단지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무우 숭숭썰어서 만든 뜨끈 뜨끈한 잔치국을 먹었는데,
그 맛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은 뜨끈 뜨끈한 그 잔치국물이 생각나네요....
어렸을 적에는 가마타고 집에서 결혼식 올리는 장면을 심심찮게 봤죠.
금진서 신금으로, 신금서 금진으로, 신금서 신금으로.
사모관대한 신랑신부한테 동네 사람들이 콩을 마구 던졌고
큰집 누나 시집갈 때 대여섯살이었는데
선학표 양철 함지박 하나 등에 메고 녹동지나 원동까지 가서
줄서서 용돈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는 친척 아그들 중 누구누구가 신부의 혼수품을 지고 가서
용돈을 받게 할 것인지 리스트업 하는 일도
친척지간의 원근을 재는 아주 중요한 잣대라서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 같고,
그 때 신랑측에서 주는 용돈도 혼수품의 가격이나 크기에 따라
서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큰 거 메고 온 넘은 많이 주고, 주전자나 함지박은 30원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