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대처에 갔다 온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언젠지 모르지만 그 어렸을 땐
오일장이 서는 대처, 대흥에 갔다 오는
울 엄마가 그리 기다려 졌다.
닭이나 돈이 될만한 것을 들고 가서는
아까징끼나 약 등을 사왔던 거 갔다.
초등무렵엔
동네 누나나 형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일하러 갔다.
그러고는 6개월이나 일년이 지나
추석이나 설이 되면
“나 서울에서 살걸랑”
“부~산서 왔지라예”.
그 말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언제부턴가 자주 듣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디! ”
그 말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서야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 없고
기반이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집 한 칸 없고
그리고 나서, 벽에 부딪힐 때…
그럴 때 그런 말을 하였나 보다.
오늘도 태양은 적대봉 위로 솓아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앞 바다는 양팔을 벌려 파랗게 감싸 안아 주고 있다.
이 느낌 때문일까?
이 기운 때문일까?
비빌 언덕이 없을 때
형이나 누나들은 그 언덕을 만들어서 비볐다.
언젠지 모르지만 그 어렸을 땐
오일장이 서는 대처, 대흥에 갔다 오는
울 엄마가 그리 기다려 졌다.
닭이나 돈이 될만한 것을 들고 가서는
아까징끼나 약 등을 사왔던 거 갔다.
초등무렵엔
동네 누나나 형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일하러 갔다.
그러고는 6개월이나 일년이 지나
추석이나 설이 되면
“나 서울에서 살걸랑”
“부~산서 왔지라예”.
그 말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언제부턴가 자주 듣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디! ”
그 말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서야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 없고
기반이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집 한 칸 없고
그리고 나서, 벽에 부딪힐 때…
그럴 때 그런 말을 하였나 보다.
오늘도 태양은 적대봉 위로 솓아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앞 바다는 양팔을 벌려 파랗게 감싸 안아 주고 있다.
이 느낌 때문일까?
이 기운 때문일까?
비빌 언덕이 없을 때
형이나 누나들은 그 언덕을 만들어서 비볐다.
오후시간은 교실,복도 광내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지나간 삶과,살고 있는 삶과 물론 앞으로의 삶에서도
양현님에 고향 글 추억은 우리네 가슴속에
덧칠 할 수 없는 순수와 가난으로 그러나 그이상의 것으로
영향력을 미치겠지요.
당시로서는 줄 수 있는 만큼 다 주었을 부모님
대흥장날이 문득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