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에서 학교 다닐 때
때마다 어머니께서 향토장학금을 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금융권이 발달되지 않아서
현금을 직접 받아오거나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는 전신환을 이용했습니다.
메루치나 개두창 팔아 한두푼씩 모이면 곧바로 탈탈 털어서 수여하시는
향토장학금의 명목으로 송금이 되었는데 금액이 얼마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학교를 졸업한 걸로 봐서는 돈없어 퇴학할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옆집 형이 몇 만원짜리 전신환과 함께 대필한 편지의 내용은 항상 이랬습니다.
"福二군, 자네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 편지와 함께
전신환을 보내네. 부모님은 건강하시니 집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사람 되길 바란다네. 그럼 이만 줄이네."
큰사람 되려 했지만 겨우 160Cm 언저리여서 항상 면목이 없는데도,
어머니께서는 그저 내가 부부싸움 안하고,
어디 아프단 소리 없이,
서울 행님 집에 자주 찾아다니면서,
테레비전에 수갑차고 들어가는 장면에 안나오는 것만으로도
겁나게 만족해 하시는게 너무 너무 고마우실 따름입니다.
때마다 어머니께서 향토장학금을 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금융권이 발달되지 않아서
현금을 직접 받아오거나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는 전신환을 이용했습니다.
메루치나 개두창 팔아 한두푼씩 모이면 곧바로 탈탈 털어서 수여하시는
향토장학금의 명목으로 송금이 되었는데 금액이 얼마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학교를 졸업한 걸로 봐서는 돈없어 퇴학할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옆집 형이 몇 만원짜리 전신환과 함께 대필한 편지의 내용은 항상 이랬습니다.
"福二군, 자네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 편지와 함께
전신환을 보내네. 부모님은 건강하시니 집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사람 되길 바란다네. 그럼 이만 줄이네."
큰사람 되려 했지만 겨우 160Cm 언저리여서 항상 면목이 없는데도,
어머니께서는 그저 내가 부부싸움 안하고,
어디 아프단 소리 없이,
서울 행님 집에 자주 찾아다니면서,
테레비전에 수갑차고 들어가는 장면에 안나오는 것만으로도
겁나게 만족해 하시는게 너무 너무 고마우실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