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예! 예! 추어탕 끓였당께라, 드시러 오시래요.
내 고향의 원래 마을 이름은 '우메기'였다. 마을에 메기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날 메기가 시냇가에 매어 둔 소를 잡아먹었다는 이유?로 '우메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 고향은 이렇게 메기, 미꾸라지가 많았다. 개울가에서는 쉽게 헤엄치는 검은 메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풍성한 가을 들판은 누런 벼 알맹이들이 황금색 옷을 입고서 가을 산들바람의 장단 맞추어 살랑거린다.
이때가 되면 농부들은 수확의 보람을 느끼며 들판을 바라보신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제는 여유가 있으신다.
누렇게 야무지게 여문 벼만 봐도 배가 부르신가 보다.
그래도 농사일이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논의 가장자리의 흙을 물이 빠지게 손으로 직접 들어 올리신다.
논의 가장자리에 물이 빠질 고랑을 만든다. 이것을 물개 친다고 말씀하신다.
약간 물이 찬 논에 고인 물을 빼려는 것이다. 그래야, 물이 빨리 빠져야 벼를
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꿈틀거리는 미꾸라지가 많이도 잡힌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 참을 수가 없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논에 풍덩 발을 담근다.
산에서 내려온 차가운 계곡 물이라서 약간 발이 차갑다.
나도 엄마 따라서 작은 두 손으로 벼를 감싸도록 흙을 긁어 올렸다.
나에게도 토실토실 살이 찬 미꾸라지가 제법 잡힌다. 짙은 황토색의 미꾸라지가
흙 사이를 가르면서 작은 길을 내면서 꿈틀거린다.
부모님은 잽싸게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양동이에 담으신다.
그러면 양동이의 미꾸라지는 꼬불꼬불 줄무늬를 남기고 잘도 기어다닌다.
아마, 살고 싶어 버둥거린지도 모른다.
계단식 논 몇 마지기 일을 하시면 제법 양동이에 황토색 통통한 미꾸라지가 담겨져 있었다.
그만큼 우리 논은 오염이 되지 않았고 농약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에는 남생이, 메기, 미꾸라지가 얕은 물살을 가르며 벼 사이를 헤엄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눈앞에 미꾸라지와 메기가 벼 사이를 헤엄쳐 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이렇게 하다보면 해님도 주황빛 얼굴로 화장을 하고 산등성이에 앉아 산을 온통 주황빛 노을로 물들인다.
가을하늘의 주황빛 노을은 새색씨의 화려한 한복같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보니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어느새 해님도 자취를 감추고 산골 논도 어둠으로 깔렸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셨다. 새카맣게 어두운 시간에 집에 오셔도 어머니에게 추어탕을 끓으라고 재촉하신다.
어머니는 몸이 천근만근 힘이 들텐데 말이다.
"어이! 추어탕 끓이소. 모두 불러다가 술 한 잔 해야제."
"예, 알았소."
어머니는 피곤하시지만, 아무 불평도 없이 어둑어둑한 밤에 뒷밭으로 열무를 뜯으시러 가신다.
그 사이 나는 아궁이에 불을 떼고 있다. 금세 어머니는 뒷밭에서 뜯어 온 열무를 가마솥에 열무 잎사귀를 삶는다.
어머니의 손놀림은 바빠진다. 컴컴한 밤에 빨리 추어탕을 끓여서 동네 어른들을 모셔다 저녁식사를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늘, 생강, 빨강 고추, 참깨, 찹쌀 등을 돌절구에 빡빡 문질러 갈아야하고,
된장과 소금 뿌려 숨죽인 미꾸라지를 삶아 돌절구에 갈아서 커다란 가마솥에 추어탕을 끓여야 한다.
미처 갈리지 않는 미꾸라지 뼈가 국물에 섞여 있다.
개조가 되지 않은 부엌에서 검은색 가마솥에 소독약 섞이지 않는 수돗물로 갖은 양념과 버물러 추어탕을 끓으신다.
비린내가 나지 않게 된장도 주물러 넣어야한다. 마지막으로 굵은 왕소금 뿌려서 간 맞추고 매콤하고 시원한 맛이 나게 파란 풋고추도 썰어 넣어야 한다.
물론 파릇파릇하게 삶아 낸 열무 잎사귀도 넣어야 시원한 추어탕 맛이 난다.
이렇게 엄마의 추어탕이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가 가마솥 뚜껑 사이로 풍겨 나오면 난 바빠진다.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다. 언니는 방 청소를 해야하고 나는 동네 어른들을 모셔와야 한다. 아버지는 누구, 누구를 모셔오라고 명단을 불러 주신다. 모두 아버지와 친하신 동네 어른들이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지나가면 어젯밤 모았던 '전설의 고향' 귀신생각이 저절로 생각난다. 특히 정근이네 대나무 밭 옆을 지날 때면 더 무섭다. 작고 더러운 대밭이 있기 때문이다. 몸에 찬 기운이 감돌고 무서웠다. 대밭에서 살쾡이라도 나올 것 같고, 고양이라도 울기라도 하면 더 심장이 오싹해진다. 그러면 내 발걸음은 오토바이 바퀴가 달린 듯 점점 속도를 낸다.
한참 눈을 감고 뛰다보면 명미 집이 나온다. 어린 나는 용기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할 지도 몰랐다. 할 말이 없으니 주로 사용한 말이 항상 똑 같았다. 호칭 문제였다. 지금 같으면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렀을 건데, 그때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 말할 호칭이 없으니 '예!'가 호칭이었다.
"예! 예! 예 말이오!"
"누구시오."
"우리 집에 추어탕 끓였당께라, 드시러 오시래요."
"어허! 또 추어탕 끓으셨대. 이렇게 자꾸 먹어서 신세만 진다야."
"빨리 오세요."
한 집으로 내 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여러 집을 돌아야 한다.
그때는 우리 집에 전화기도 없었다. 내가 우리 집 꼬마 우체부다.
부모님은 형제 중에서 나에게 심부름 잘 시키셨다. 그래서
"돌둘메 댁 둘째 딸은 야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열 집 이상을 돌아야 어른들이 우리 집에 모이신다.
한 방으로 부족하고 두 방 정도가 빽빽이 사람들이 모여야 사람이 다 모인 셈이다.
모두들 농사일을 하시고 오시기 때문에 어머니가 끓으신 시래기 추어탕을 진짜 맛있게 드신다.
여기에 막걸리도 빠지지 않는다. 이때 어머니는 오시지 않은 집은 직접 추어탕을 떠다가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시키신다.
이런 날은 나도 바쁘다. 늦가을 가마솥에 추어탕을 끊여서 따뜻한 온돌방에서 드신 시골 농부들의 얼굴 표정이 훤했다.
얼큰한 추어탕에 햅쌀 지어 올린 쌀밥을 추어탕에 말아서 한 입 입에 넣으신다.
오물오물 씹어 드시는 아랫집 명미 아버지의 눈가에는 잔주름과 짙은 미소가 가득해진다.
게다가 푸성귀 뜯어다 무친 열무김치와, 멸치젓에 풋고추 송송 썰어 버무린 반찬에 풋고추 된장에 찍어 먹는 맛과
햇무를 잘게 썰어 소금, 고춧가루, 마늘, 참기름, 참깨 버무린 무생채는 피곤에 지친 입맛을 돋군다.
추어탕이 맛있는 것도 부모님의 인심과 어머니의 두꺼비 손 같은 손맛에서 배어 나온 음식 솜씨와
이웃들의 소탈한 인정이 삼박자가 어울려져 맛이 매콤하고 시원한 맛이 난 듯 싶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살아온 나는 부모님에게서 사람 살아가는 정을 배우고,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받았다.
어린 시절 나는 소꿉장난을 많이 했다. 엄마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
쓸데없이 소꿉장난한다고 구박을 받았다.
서른 네 살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먹으며 산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삶보다 풀 냄새나는 시골의 소탈한 삶이 좋다.
시골 인심이 몸에 밴 나는 오리탕, 추어탕, 감자탕을 끓여서 이웃과 나눠 먹는다.
어린 시절을 더듬어 추억을 기억 삶아 글쓰기를 좋아하는 세 아이의 어머니다.
사 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시로 이사와 동생과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추어탕 이야기를 하시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카랑카랑하게 말씀을 하신다.
"한 솥 단지 추어탕 끓여서 동네 잔치했지. 징그럽게도 맛이 있었다."
홀로 되신 어머니도 시골에서의 추어탕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사셨나 보다.
오늘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시면서 친정 어머니 눈물 꽤나 흘릴까 겁이 난다.
부모님의 인심을 닮아서인지 나도 음식을 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기를 좋아한다.
얼마 남지 않은 방송통신대 출석수업이다.
돌아오는 출석수업 때는 감자탕 한 솥 단지 끓여서 만나면 반갑고 웃음과
미소가 절로 나오는 학우들에게 맛있는 감자탕을 손수 정성스럽게 끓여서 먹이고 싶다.
이 바램이 현실로 다가오면 좋겠다. 짧은 육십 분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생을 살면서 생각만 해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나도 덩달아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게....
우리 마을 후배 아짐씨들!
매운탕도 좋고 지리로 끓여도 좋당께라.
누구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