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1년간의 기록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그 중에서
4월 12일~15일 4일간의 기록이다
일기 서두에 "아버지 애상을 회상하며"로 시작하여
18장을 써내려 가셨다
"나는 아버지 가시고 한달 5일이 지난 오늘 슬픔 감정을 억누르며 회상한다."며 마무리되었다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6월 30일
6월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7월1일.
달이가고 또 새로운 달을 맞이 하려는 오늘 지난달의 흐름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했던가 .
발견한것도 없고,
진실을 다 바쳐 해 본 일도 없다.
헛된 고역 그지없는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속에서 마음을 허비 하였다.
이런 허무와 무상을 되씹고 있다는 것은 나의 퇴보를 의미하는것이다.
전진하지 못하고 퇴보한다는 것은 이내 사는 것만 못하다.
6월의 퇴보를 거울로 비쳐보고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자.
내일이면 맞이할 7월은 좀더 보람있기를 마음속 약속하면서
그지없는 6월의 마지막 시간을 서산에 보내다.
6월 30일 저녁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삼학도에 산보를 하였다.
무덥고 텁텁한 방에 있다가 바닷 바람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상쾌하다.
오후에는 비가 좀 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으면서도 오지 않는다.
삼학도의 저녁 바람은 나의 외로운 마음을 바람결에 씻어 버려 준다.
심호흡을 몇번이고 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명동 빈민촌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이곳에는 아주 가난에 지친 사람들이 판잣집 한 두간 방에서 생활을 하는 곳이다.
먹는날이 일하는 날,쉬는 날 보다 적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모인 곳이다.
과연 저녁 식사때의 이 골목은 가난이 몸서리치게 드러나 보인다.
가난한 골목 어떤 오두막집에서는 부부간의 정다운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행복이란 이런것인가 싶었다.
목마른 그리움이 나의 전신을 육박한다. 밤마다 그리움속에서 몸부림 친다.
사람,그리움.... 이것은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하고 없어서는 안된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란 마른 나무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사랑이 그립다.
한 길가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몇이나 되는가 세다 세다가 그만 지처 버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죽동 큰 길가에서 그들의 표정을 더듬어 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에 같은 사람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제 각기 바쁜 일 있어 저렇게 오고 가겠지.
그 중에는 배가 불러 소화 작용으로 거닐은 사람도 있을께고
어떤 사람은 전당포에 무엇을 잡히려가는 사람도 있을게다.
일일이 헤아리자면 한이 없다.
우선 이 두가지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조적인가.
한사람은 배가 불러 또 한사람은 끼니가 없어 옷을 잡히고
전당포 천대빚 얼굴을 감추고 살야만 하니
하늘과 땅 차이가 드러나 보인다.
같은 민족 같은 민주주의란 생활의 원칙아래 인간의 권리와 의무의 원칙 아래
이처럼 대조적이란 역시나 모순이다.
이사회는 모순 덩어리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순에서 태어나 모순으로 살다가 모순에서 죽어 간다.
사람의 생활이 이래서야 20세기의 문명을 자랑하고
자유를 찾는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생산을 목적으로한다지만
어디 믿고 살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목적이 무시되어 가지고 어찌 산다고들 하겠는가.
이렇게 굶주리고 허덕인 이런 궁팍한 사회에서도 정신 교육이랍시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먹지 않고 ......성심껏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해서 배가 부를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허수아비적인 정신교육이 오늘의 비참한 사회 가난한 사회로 만들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인구는 기아급수적으로 늘고 땅은 좁고 공업은 발달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란 말이냐.
자급자족 생활을 못하는마당에 거리에는 술집이 너무도 많다.
사회가 혼탁하면 할수록 술 주정뱅이가 많다.
소비품만 늘고 있다. 어떻게하면 잘 살수 있을고.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피천득>
* 아버지 일기는 28세 젊은 시절 일상의 기록이지 뭐
*모든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치 말라
*(위에서 피천득 아저씨의 이야기처럼 받아 드리렴)
*사진이랑 다 배꼽만 보이네 들어가서 함 봐야겠다
*좋은 시간 보내라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거 다해라. 열중해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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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4월 12일
어제 숙모님께서 고향에서 전화가 왔다고
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부친께서 12,3일 전에 집에 갔을때는
그렇게 대단하시지 않고 위가 아프시는지
밥을 좀 못 잡수시는것 뿐이었는데, 앞이 캄캄하다.
혹시나 하는 예감이 머리에 든다.
며칠을 두고 꿈 자리가 험하고 험하더니 이상하구나.
꿈에 큰어머니들이 흰옷을 입고 계신것도 보았고
형용할수 없는 험한 꿈들이 잠을 못이루게 하더니,
어제는 이런 비보에 접하고 말았다.
설마하고 광주에서 현민친우와 같이 아마도 광주로 모시게 될것이라고
모시고 오시면 고생해 달란 부탁까지 하고 7시 10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상한 예감, 실끝같은 희망속에서 아버지께서 혹시나 어떠실까
그제까지 병원에 입원 하셨을까
혹시 오늘 광주로 가실까 하면서 광주가는 차가 보일적마다 내다보고 하였다.
버스는 녹동에 닿았다.
준화동생 집에 들리니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 10시에 급서거 하셨다는 비보다.
아 실망이다. 앞이 캄캄하다.
정신없는 생각으로 2시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거짓말 같았다.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같은 이상한 예감!
설래는 내마음을 바로 잡을수가 없었다.
아버지 드릴려고 광주에서 사과를 샀다.
그도 현민 벗이 돈을 1000원 주어서다.
이상하다.
내눈으로 보기전에는 전혀 터무니 없는 소리려니하고 자위까지 하면서
그 말을 믿으려고 생각지 않았다.
바로 엊그제 내가 집에서 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일이냐?
가슴이 뛴다. 마음은 걷잡을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야 옳단 말이냐.
나에게는 형제간이 많다. 귀여운 동생 고사리 같은 동생들이 한참 자란다.
배에 몸을 실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급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나를 동정한다.
고향에 연락선이 나를 실어다 주어서 바로 내렸다.
아 슬픈 일이다. 동생들이 나를 마중나왔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나는 어쩌란 말이냐.
아직까지 눈물이 나지 않는다.
조금더 걸어 갔을때 내집에 흰옷들이 있었고, 흰 천막들이 처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은 말랐다.
집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갔을때 누나와 동생들이 상복을 입고 나왔다.
우리 형제는 서로 부등켜 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오듯한 눈물이 끝일줄 모르고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진다.
누나에 몸을 간신이 의탁하고 방에 들어섰다.
연발.. 이것이 왠일이냐, 눈물바다 5형제 5남매, 동네사람,...
큰 아버지 내분, 숙부님, 큰 어머니, 형수님, 사촌형님,동생들....
온 집안 사람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장손이다.
11일 저녁 8시에 돌아가셨다니
12일 현재 3시까지 누나와 누이는 그리고 내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목이 컬컬하다.
그런데 또 내가 왔으니 명색이 장남이라고 임종시에도 못보고 그 마음이 오직하랴
그래 저래 이 슬픔 속에서 또 내가 나타났으니 얼마나들 울었는지 ...
숙부님은 나보다 슬프게 아버지 두상을 붙안고 나를 보라 하셨다.
나는 차마 볼수가 없어 비명에 찬 소리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이 형용 할 수 없는 심정.
사람이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을 글로서 표현하려니
어떻게 나의 슬픔 마음을 표현 할 수 있으랴.
나는 일찍이 슬픈일을 당해 보지 않은체 넉넉치 못한 가정이나마
남부럽지 않게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살아서 눈물을 모르고 살았다.
남이 슬퍼서 울때면 나는 속으로 어쩌면 저렇게 눈물이 나올까 하고,
의심까지 하였던 나다.
그러나 막상 환경이 이처럼 비극이 나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 갔다.
이때의 심정으로는
온 세상의 권력 세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권력과
온 천하 세계를 다 살 수 있는 재벌가가 되라고 해도 아버지와는 바꾸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고 동생들은 저마다 소리치면 슬픔?ㅓㅓ을 비명한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는 양복을 벗고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는 한쪽 어깨는 끼지 않은체 한쪽 소매만 팔을 끼었다.
부모상을 당하며 죄인이 되는고로 남의 눈에 보기 싫게 보이라는 것이라 한다.
조문하려 오는 손님이 오면
꼬마동생까지 5형제는 곡을 하고 절2배 반자리 하도록 곡을 끝내고 인사를 한다.
백부님은 나 몰래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닦고 한다.
어린 조카인 우리에게 눈물을 슬픈 빛을 안보이기 위해서이다.
중주님 세분도 백부님과 한결같이 슬픔 표정속에서
눈물을 나몰래 흘리고 닦으시고 하신다.
큰 아버지들 께서는 나를 한없이 위로하신다.
오늘이면 광주에 입원 수속까지 밟고 택시까지 준비 해 두었는데도
이렇게 갑자기 그랬으니 운명이라 어찌 할 수 없다 하신다.
저마다 입달린 사람이면 운명이라 할 수 없구나 하신다.
나도 운명론자를 ??ㅠㅠ한자라고 경멸해 왔지만
이때처럼 그 운명이란 두 글자가 듣기 싫고 진저리 몸서리친지 모르겠다.
아 운명 이것도 운명이란 말이냐.
좀더 빨리 서들었드라면 살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그 운명이 얄밉다.
뭣 때문에 운명이라 하는가,
생 사람을 죽여 놓고도 운명이라 하는가 하며
터무니 없는 반항도 하고 몸부림 쳐본다만 소용없는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임종시 끊임없이 손을 휘두르며 나를 찾으시드라고 하신다.
그런 말 들을적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
가슴이 쓰려 미어 지는것 같다.
왜 이다지도 내 마음이 괴로울까.
둘째 동생 덕화군의 슬픔이란 말할수 없다.
슬픔은 자식된 도리로써 다 같겠지만 덕화만은 슬픔이 나와 다를 것이다.
명년에는 장가 보네기로 한 동생이니 말이다.
세째동생 도화는 정신없이 소리치며 뒤궁글어 댄다.
남아로써 막둥이는 소리없는 눈물만 흐른다.
그 어린동생을 처다 볼적마다 새삼스래 눈물이 쏟아진다.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려고 어려서부터 한번도 눈물이 없었으니
인제 그 눈물이 다 나오는가 보다.
아버지께서는 임종시 나를 찾으며 손을 흔들다가 가셨다.
나는 장손 아들이지만 끝내 아들 노릇을 못하고 말았다.
나를 위해서 고생하시던 아버님을 생각할때 또 다시 가슴이 뛰고 서러운 분노는 복 바친다.
12,3일 전에 나는 하숙집을 나와 자취를 한다고 아버지께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
나는 세상에 막 나오면서 부터 아버지 인생이 끝날때 까지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
생각하면 한없이 불효 자식인 나다.
가슴이 미어진다. ??어진다.
나는 그때 집에 갔을적에 알아서 병원에 입원 못 시킨것이 한없이 후회스럽고 죄만 스럽다.
이제 나는 어쩐단 말이냐,
어머니는 목이 메일 정도로 슬피우신다.
내 아내는 아버지 임종시 내가 없어서 그 슬픔속에서도 얼마나 허전했을까.
어린 꼬마 동생 6살짜리 여식은 세상모르고 놀고 있다.
국민하교 2학년, 5학년짜리는 다소 무엇을 아는 모양이다.
손자를 그렇게 귀엽게 하시고 자랑하시더니 인제는 손자도 못보게 되셨다.
국이는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국 엄마도 마찬가지다.
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고 소문이 났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없으니 복이 없는 며느리다.
나는 내 아내에게 미안한 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저녁에는 어버지 시신 옆에서 꼬박 눈을 붙혀볼 사이도 없이 뜬 눈으로 새웠다.
백부님께서도 가시지 않고 어제 저녁에도 큰 형님이랑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말을 안했지만 어제 저녁 나는 아버지께서 임종시 나는 광주 극장안에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 영화를 감상하러 갔다.
이 사실을 세상이 안다면 비웃을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마땅이 임종시 자리에 있어야 할 장남인 내가 극장에가 있었으니 하늘도 노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상으로 단일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한이다.
목포에 있었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금산병원에 9일간이나 입원하고 계실때도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신다.
나에게 걱정을 끼쳐 주고 싶지 않으려는 거룩한 마음씨에서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거룩하신 마음씨를 전해 들을적마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것 같다.
차라리 그런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위로한다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거룩하신 마음씨를 치하하고 평소부터 남에게 거짓이 없으셨고,
나쁜일은 손톱만큼이라도 하기 싫어한 아버지의 마음씨를 전해 들을적마다 내 마음이 괴롭다.
아버지는 나에게 소식 전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끝내 장남인 내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한체 저 세상으로 가셨다.
장례식은 4일장으로 정하셨다 하신다.
동네 사람들이 3일장 권유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께서 단하루라도 더 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루를 연기하셨다고 하신다.
12일 저녁 91세 되시는 할머니를 찾았다.
6형제 자식이 티하나 없이 정답게 살다가
다섯째 아들이신 나의 아버지께서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할머니 마음은 얼마나 슬프고 괴로우랴 싶어 할머니를 위로 할 겸 큰댁에 갔다.
나는 나올려는 울음을 참다 참다 못해 할머니를 잡고 구슬같은 눈물 방울을 연방 떨어뜨렸다.
그 구슬같은 눈물이 할머니께서도 떨어진다.
백발이신 할머님의 슬픔은 오직 할까.
할머니에게는 죄송한 말씀같지만 동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차라니 할머니하고 바꾸었더라면 좋았을걸 한다.
할머니께서도 하느님도 무정하시지 나는 잡아가지않고 젊은 사람만 잡아 가신다고 원망하신다.
51세의 젊은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