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지금 나이가 40이 넘었어야 지금 쓰고자 하는 내용을 겪어 보아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릴때 보면 왜 그렇게도 종기라든가 부스럼이 많았는지!
여름이면 종기라든가 부스럼을 전부 하나씩은 몸에 달고 다니고
겨울에는 옷속에 이를 한홉씩은 전부 품고 다녔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솟옷도 갈아 입지 않지, 목욕도 하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클때는 종기나 부스럼 치료제로 "뻘약"이라는 약을 집집마다 구비해 놓고 있었는데
그 "뻘약"이 종기나 부스럼에 별로 치료 효과도 없었지만 그것이라도 발라야 더 번지지는 않았는 것 같았다.
"뻘약"은 무슨 원료로 만들었는지, 또 공인된 의약품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장이 서면 "뻘약'장수들이 몇명은 있었고 구멍가게에서도 팔았는 것 같았다.
그 "뻘약"이라는 것의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바닷가의 "뻘"같이 생겨서 그냥 흔히 쓰는 말로 "뻘약"이라고 했지 싶으다.
여름이면 집집마다 많은 애들중에 거의 한군데씩은 부스럼이 있으므로
저녁밥을 먹고 잠자기 전에 전부 등잔불 밑에 모여서
"뻘약"을 애들에게 발라 주는 것이 엄마들의 하루 일과중 마지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 "뻘약"이 그렇게 비싼 약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워낙 돈이 귀했으므로 "뻘약"도 많이 사다 놓고 바르지 못하고
지금 김치통만한 통으로 한통씩 사다 놓면 새끼들 숫자는 많지
또 새끼들별로 여러군데 부스럼이 있어 거의 일주일 내지 2주일만에 "뻘약"을 한통씩
발라 버렸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뻘약"을 떨치지 않고 제때에 쌀이나 콩을 팔아 사다 놓는 것도
바쁜 엄마의 임무중에 하나였다.
그런 "뻘약"에 관해서 항상 새로운 기억이 하나 있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전인데
5반 용식이 하고는 나이가 동갑이고 또 바로 옆집에 살아서
어릴때 같이 많이 놀았는 것 같다.
하루는 갑자기 용식이 발을 보고는
그때 당시 거의 만병통치약으로 활용하는 "뻘약"이 생각나서
집에 있는 "뻘약"을 가져다 용식이 발에 진짜 뻘속에 푹 빠졌다 나온 것같이 발라 주었다.
*참고로 후배들은 용식이의 발이 어떤 불구인지 잘 모를 것 같아서 설명하는데
용식이는 태어 날때부터 발바닥이 뒷쪽으로 향하고 발등 일부분을 발바닥으로 쓰고 있는 장애인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날 저녁에 우리 집에는 난리가 났다.
저녁밥을 먹고 등잔불 밑에서 "뻘약"잔치를 벌이려고 하는데
어제만 해도 그 많던 "뻘약"이 거의 없어져 버리고
"뻘약"통이 거의 빈통으로 궁굴어 다녀서
그 많은 형제 자매들의 부스럼에도 그날은 "뻘약"을 바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뻘약'의 행방을 추궁한 결과
이집 큰아들이 지 친구 발 치료제로 전부 발라 주어서 "뻘약"통이 빈껍데기로
남겨 되었음을 알고 저녁에 잠자고 있는 용식이 발을 확인하고 하는 등
소동을 겪으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몇일후
내가 엄마에게 그러더란다.
전번에 용식이 발에 "뻘약"을 발라 지금은 많이 낫은 것 같으니
또 집에 있는 "뻘약"을 가져다 발라주면 않될까? 하고 물어 보더란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용식이는 어렵게 성장하여
직업도 가지게 되었고
결혼도 하게되어 건강한 애들까지 두어
큰애가 대학까지 입학하였으나
애들 엄마가 애들 학자금까지 가지고 가출을 해버려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뻘약" 생각이 다시한번 새로워지면서
나의 부랄 친구 용식이 생각에
가련함을 떨칠 수가 없다.
용식아!
세상은 어떤 고난이 닦치더라도
헤어날 길은 있을 것이다.
더한 어려움과 치욕도 견디었는데 이런 어려움쯤이야 멀리 던져 버리고
하루 빨리 아름답고 평온한 삶으로 돌아 가길 빌어 볼께.
어떻게 보면 예민한 점도 있을 것 같으나
용식이는 나를 가장 좋은 친구로 아마 기억할 것이므로
이 글을 게재하게 되었다.
길수라든가 여러 후배들이 내가 맨날 다른 동네에 가서 논다고
성화가 대단하고, 또 중촌카페에 어울리는 이 글(용식아!)이 생각나서
이 글을 게재하게 되었다.
앞으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중촌카페에 글을 올리고 싶으니
우리 사랑하는 중촌후배들도
댓글도 많이 달아 주고, "새글쓰기"도 많이 참여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