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귀굿은 중국에서 민속악으로 발전하여 예술문화로 우리나라에 정착한지는 조선조 사백년전이라고 한다.
인지가 발달하면서부터 매귀 종류가 분류되고 조선조 선조대왕 1592년때부터 축제에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매귀굿을 군악으로 사용한지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수사 이순신장군께서 염포와 한산도 해전에서 개전 성과를 올릴 때 마다 매귀굿을 군규로 다스렸다고 한다.
매귀굿 종류에서 문굿이라고 분류하기는 1597년 정유재란 우수영 해전에서 대승을 거듭하자 민,관,병의 환호소리와 군악소리로 고금도진 성문을 열게하였다 하여 문굿이라 부르고 있고 호국성지 남해안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명절을 택하여 문굿 축제와 매귀굿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월포 마을에서도 1930년 전부터 매년 정월초삼일을 제일로 정하고 주민의 안일을 위하야 매귀굿으로 행사한 풍습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130년 전 최초 매귀굿 지도자는 최재봉 할아버지였고 후계자는 진야무 황형오 최수채였다고 한다.
그후 매귀와 문굿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부터는 문굿을 군악으로 사용한다하여 일제 왜정관서가 매귀와 문굿을 폐지탄압하고 농민의 농악으로 개칭하라하여 1919년부터 농악이라고 부르고 있다
매귀와 문굿이 농악으로 생활화하도록까지 맥을 이어오고 보존하고 있으나 악보와 율동은 구분되어있다. 그러나 문굿은 왜정탄압으로 다년간 폐지되기도 하고 그 동안 문인들이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굿의 맥을 이어오기는 1866년 경복궁 준공식때 전라도 대표 고흥 나로도 상쇠 박군선이 문굿을 치고 최우수상에 입상하자 전하께서 경연장에서 박군선 상쇠에게 대상을 하사했다는 유래도 있다
고흥군 나로도 박군선 문하에는 후계자 김응선 두원면 김군수 금광열 김덕칠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왜정탄압으로 산회되고 작고하녔으나 다행히도 나로도 김응선이 신청업으로 각지방을 순회하다 1930년 금산면 오천에 거주를 하면서부터 월포 농악인들과 합류하여 오년동안 연습과 시연도 했다고한다.
그때의 상쇠 진야무 종쇠 최병태 삼쇠 김형철 황삼포 황귀열 김형태등이 김응선 후계자라고 지방의농악인들은 인정 하고 있다 지금의 월포 농악의 특유한 점은 현상쇠 최병태 이하 하태조 정이동 진삼화 선종섭 박청포등의 쇠잡이와 사물조직이 단일마을 남녀 육십명으로 체계화하여 예향의 맥을 전승 보전하고있는 점이 실상이다.
이를 뒤늦게 고흥 유관기관 문화단체등에서 인지한 후 마을을 답사하고 시연과 조직을 심사 검토 후 문화예술 전남 지회장 정홍수씨가 고흥 국악회 김현량 박종덕과 합의 일관으로 대표농악으로 지명을 받고 1988년부터 각군 경연에 출연도 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전남대표로 지명을 받고 전국 제33회 민속예술 경연대회를 경북 구미에서 개최할 당시 출연하여 그때의 특수했던 연기는 상쇠이하 전원이 가무와 악법이 일치할 뿐 아니라 각 사물놀이 역시 상쇠의 지휘에 유동이 일치하여 묘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무를 전국에 과시하고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여 칭찬속에 고흥을 문화예술군으로 칭호를 높히기도 하였다
그후부터 문굿의 보존과 맥을 후세에 전승시키고 영구보존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문굿전수회관건립과 지방문화재 구성을 위하여 문화전문위원과 도정의원의 후원을 적극 구하여 1995년 12월5일 상쇠 최병태지방문화재 27호로 지정을 받고 1996년 11월 전수회관을 승인에따라 1997년 12월 30일 준공하였다
이러한 성사로 월포 문굿 보존회는 조선조 사백년 전통 문굿의 맥을 영구 보존토록 농악의 유래와 전수회관 건립취지를 주민과 후손에 전승을 위하여 여기에 새겨 문화예술보존 마을로 지속케한다.
인지가 발달하면서부터 매귀 종류가 분류되고 조선조 선조대왕 1592년때부터 축제에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매귀굿을 군악으로 사용한지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수사 이순신장군께서 염포와 한산도 해전에서 개전 성과를 올릴 때 마다 매귀굿을 군규로 다스렸다고 한다.
매귀굿 종류에서 문굿이라고 분류하기는 1597년 정유재란 우수영 해전에서 대승을 거듭하자 민,관,병의 환호소리와 군악소리로 고금도진 성문을 열게하였다 하여 문굿이라 부르고 있고 호국성지 남해안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명절을 택하여 문굿 축제와 매귀굿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월포 마을에서도 1930년 전부터 매년 정월초삼일을 제일로 정하고 주민의 안일을 위하야 매귀굿으로 행사한 풍습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130년 전 최초 매귀굿 지도자는 최재봉 할아버지였고 후계자는 진야무 황형오 최수채였다고 한다.
그후 매귀와 문굿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부터는 문굿을 군악으로 사용한다하여 일제 왜정관서가 매귀와 문굿을 폐지탄압하고 농민의 농악으로 개칭하라하여 1919년부터 농악이라고 부르고 있다
매귀와 문굿이 농악으로 생활화하도록까지 맥을 이어오고 보존하고 있으나 악보와 율동은 구분되어있다. 그러나 문굿은 왜정탄압으로 다년간 폐지되기도 하고 그 동안 문인들이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굿의 맥을 이어오기는 1866년 경복궁 준공식때 전라도 대표 고흥 나로도 상쇠 박군선이 문굿을 치고 최우수상에 입상하자 전하께서 경연장에서 박군선 상쇠에게 대상을 하사했다는 유래도 있다
고흥군 나로도 박군선 문하에는 후계자 김응선 두원면 김군수 금광열 김덕칠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왜정탄압으로 산회되고 작고하녔으나 다행히도 나로도 김응선이 신청업으로 각지방을 순회하다 1930년 금산면 오천에 거주를 하면서부터 월포 농악인들과 합류하여 오년동안 연습과 시연도 했다고한다.
그때의 상쇠 진야무 종쇠 최병태 삼쇠 김형철 황삼포 황귀열 김형태등이 김응선 후계자라고 지방의농악인들은 인정 하고 있다 지금의 월포 농악의 특유한 점은 현상쇠 최병태 이하 하태조 정이동 진삼화 선종섭 박청포등의 쇠잡이와 사물조직이 단일마을 남녀 육십명으로 체계화하여 예향의 맥을 전승 보전하고있는 점이 실상이다.
이를 뒤늦게 고흥 유관기관 문화단체등에서 인지한 후 마을을 답사하고 시연과 조직을 심사 검토 후 문화예술 전남 지회장 정홍수씨가 고흥 국악회 김현량 박종덕과 합의 일관으로 대표농악으로 지명을 받고 1988년부터 각군 경연에 출연도 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전남대표로 지명을 받고 전국 제33회 민속예술 경연대회를 경북 구미에서 개최할 당시 출연하여 그때의 특수했던 연기는 상쇠이하 전원이 가무와 악법이 일치할 뿐 아니라 각 사물놀이 역시 상쇠의 지휘에 유동이 일치하여 묘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무를 전국에 과시하고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여 칭찬속에 고흥을 문화예술군으로 칭호를 높히기도 하였다
그후부터 문굿의 보존과 맥을 후세에 전승시키고 영구보존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문굿전수회관건립과 지방문화재 구성을 위하여 문화전문위원과 도정의원의 후원을 적극 구하여 1995년 12월5일 상쇠 최병태지방문화재 27호로 지정을 받고 1996년 11월 전수회관을 승인에따라 1997년 12월 30일 준공하였다
이러한 성사로 월포 문굿 보존회는 조선조 사백년 전통 문굿의 맥을 영구 보존토록 농악의 유래와 전수회관 건립취지를 주민과 후손에 전승을 위하여 여기에 새겨 문화예술보존 마을로 지속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