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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5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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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7세 나이에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스승은 온갖 억압과 차별을 겪었다. 나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그런 설움을 겪었는데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간 스승은 오죽했겠는가. 문제는 그런 차별을 당해도 꾸욱 참고 견디면 되는데 스승은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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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6월 5일 스승은 JAL 스튜어디스 출신의 다나카 게이코와 재혼했다.
스승이 신혼여행 갔던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신부와 함께 다정히 걸어 나오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스승은 국적을 숨기며 살았지만 일본인이 시비를 걸면 마치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스승은 어디를 가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는 꼭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회에 밝힌 스승의 폭행 가십 전말은 이렇다. 힘 좋은 사내들은 "역도산 겁쟁이! 저런 ××가 무슨 세계 챔피언이야" 하며 시비를 걸었다. 스승은 그들이 욕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넘어갔다. 주변 사람들도 스승 옆구리를 쿡 찌르며 "역도산 선생이 모른 척하세요"라고 했다. 스승도 분위기를 깨기 싫어 잘 참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자 주변 사람들도 "더 이상 참아"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스승을 향해 침을 뱉고 맥주병까지 던지자 스승은 "난 성인군자가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참고 싶은 마음이 없다"라고 말한 후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프로레슬러가 무르게 보여선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그들은 스승이 다가가자 어깨를 툭 치며 "역도산! 나와 한판 붙자는 것이냐"라고 대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큰 싸움이 날 것 같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들기 마련이다. 스승은 그런 그들 중 한 명의 멱살을 잡고 위아래로 들었다 놓았다 한 뒤 그를 뒤로 밀쳤다.
 
스승의 힘을 본 그들은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신문은 스승이 술집에서 누구와 시비가 붙어 폭행을 휘둘렀다는 가십 기사를 내보냈다. 그때 스승은 프로레슬링에서나 사용하는 당수 촙 등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신문사에 당수 촙까지 사용했다고 거짓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이 이 기사에 대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하는 기자회견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냥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시비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모두의 시비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당시 스승의 나이는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폭력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 대개 이런 식으로 시비가 붙어 표면화한 사건이다. 싸움이란 것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쌍방에 문제가 있다지만 일단 스승과 싸웠다면 무조건 스승의 잘못으로 몰고 갔다.
 
그런 사실에 분개한 스승은 왜 그들의 시비에 대항하는지 밝힌 적이 있다. 대충 이렇다. "난 한 번도 폭력에 의한 협박에 굴한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굴복하면 그들은 의기양양해진다. 또 폭력배들에게 한 번이라도 금품을 주게 되면 '역도산에게도 협박이 통하는구나' 하는 소문이 두고두고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이 이유였다. 어떤 지인들은 "다 유명세 때문이죠"라고 나름대로 위로가 곁들인 분석을 내놓았지만 스승은 유명세는 그 다음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한 번은 동경 아카사카 한 바에서 폭력배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승이 바에 온 사실을 안 폭력배들은 "좀 만나자"라는 쪽지를 적어 보냈다. 스승은 답변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웨이터까지 보냈지만 손으로 안된다는 시늉만 했다.
 
폭력배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중 팔에 문신을 새긴 덩치 좋은 녀석이 스승에게 다가왔다. "야, 역도산! 뭐 그리 잘났어. 한 번 만나자는데 그렇게 시간이 없어"라고 쏘아붙였다. 스승이 계속 무시하자 그는 "야, 네 배엔 칼이 안 들어갈 것 같애"라고 엄포를 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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