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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52]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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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은 돈과 사업에 관한 동물적 감각을 타고 났다. 지금이야 흔한 것이 스포츠 센터지만 어떻게 1959년도에 레슬링 전용 경기장과 헬스장을 갖춘 매머드급 스포츠 센터 건립을 계획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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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 아카사카 숙소 입구에서 운동을 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몰골이 초라한 노인에 불과한데 이 사진을 보니 나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란 생각이 새삼 든다.



이를 보더라도 스승은 아이디어와 돈벌이에는 탁월했다. 스승은 보기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참 섬세하고 치밀하다. 침실과 승용차에는 늘 메모지를 준비해 뒀다. 화장실 가다가 혹은 외출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르면 돌아와서 비서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메모를 습관화했다.
 
1961년 리키 스포츠 팰리스가 오픈하면서 스승은 프로레슬러와 프로모터뿐만 아니라 숱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맨션 분양·사교 클럽·사우나·스테이크 하우스·골프장 건설·렌터카 사업에도 손을 댔다. 모두 미국과 유럽을 드나 들면서 벤치 마킹한 것들이었다. 스승은 "일본은 곧 미국처럼 된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일본서 성공시대를 연 스승은 정·관·문화·연예계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저마다 "내가 역도산에 대해 많이 안다"라고 으스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아는 기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난 역도산과 친하다. 내가 아는 역도산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종종 말을 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스승에 대해 빙산의 일각만 알 뿐이다. 솔직히 스승의 그림자 곁에 있었던 나도 스승이 어떤 사람인 줄 잘 모른다. 그들이 스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이 신빙성이 있겠는가. 일본 언론들은 그들의 얘기를 듣고 기사를 많이 적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오보인 셈이다.
 
국내에도 스승과 관련된 책과 소설이 몇 권 출간된 걸로 안다. 일본에선 스승을 소재로 한 책이 20여 권 이상이다. 영화와 드라마 소재로도 빠지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다. 스승이 작고한 지 43년이 흘렀지만 가끔 레슬링 잡지에는 스승이 표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한다. 스승이 북한 출신인 관계로 평양 순안공항에는 스승 책이 진열돼 있다. 지금도 북한에선 역도산을 조선 제일의 레슬러 영웅으로 부른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몇 년 전 국내 한 영화사는 스승 영화를 만들었다. 난 그 영화는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다. 그 영화가 스승을 너무 많이 모순되고 왜곡되게 그렸기에 그것을 보면 속이 상할 것 같아 보지 않는 것이다. 스승이 야쿠자를 때린 후 칼에 찔려 죽은 것은 둘째 치고 그 영화에는 스승이 부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지만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양아치에 비유된다. 특히 일본 같은 경우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얼마 전 일본에 갔더니 나의 후배이자 스승의 일본 제자이기도 한 원로 레슬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 출신 스승을 영웅으로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듯한데 도리어 일본에서 영웅인 스승을 삼류로 깎아내렸다"라고 분개했다. 난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 창피했다. 그리고 그는 "선배님이 감수를 좀 하시지 뭐했습니까"라고 따지듯이 반문했다. 불행히도 그 영화사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이나 후에도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스승이 아닌 이상 스승에 대해선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난 스승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스승의 사상과 철학이 뭔지, 그 분이 무엇을 위해 고뇌했고, 그리고 추구했던 이상이 뭔지는 대충 안다. 물론 그분과 친분 관계가 있는 인사와 일반인들이 모르는, 나만이 아는 그분의 모습까지도 알고 있다.
 
60년대 초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거리였다. 스승에 대한 일본 기자들의 취재 경쟁은 대단했다. 이들 중 나와 안면 있는 기자들은 내게 슬며시 다가와 스승에 대해서 은근슬쩍 묻곤 했다. 스승에 대해 큰 건을 얘기해 주면 진하게 한 턱 쓰겠다고 회유까지 했다. 이들이 스승의 폭력성에 대해 집중 취재한 적이 있다. 지금부터 스승의 폭력성에 대해 밝히겠다. 그리고 야쿠자까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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