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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2015.01.29 10:50

명인전

 

 

앞의 글 국수란?’의 마지막에 역시 국수는 한국바둑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온 가장 자랑스러운(권위 있는) 타이틀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라고 썼는데 이 글귀 중 한국바둑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온이란 문장이 못내 마음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다시 쓴다.

 

그 이유는 역대 국수 중에서 윤기현, 하찬석, 윤준상 및 조한승 등도 한국바둑의 계보를 이어온거물로 인정해야 하는가?이다.(루이나웨이는 한국사람이 아니므로 거론하지 않겠다)

물론 이들도 한국바둑의 쟁쟁한 고수들이었지만 당대의 제1인자라는 말을 듣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듯한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우리의 바둑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이렇게 한국바둑의 계보를 이어온기사들만이 쟁취한 기전은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명인전이 더 어울린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이다.

명인전은 국수전보다 15년 늦게 1969년에 창설된 기전인데 그 우승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우승자

순서

기사명

우승회차

우승

회수

비 고

1

조남철

1, 3

2

 

2

김 인

2

1

 

3

서봉수

4~7, 9, 13

6

 

4

조훈현

8, 10~12, 14~20, 27

12

 

5

이창호

21~26, 28~34, 37

14

 

6

이세돌

35~36, 40

3

 

7

박영훈

38~39, 42

3

현재 타이틀 보유자

8

최철한

41

1

 

 

위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명인 타이틀을 한 번씩 쟁취해 본 기사들은 그 면면이 한국 바둑을 대표할 만했고 이로 인하여 한국 바둑사의 흐름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 이 표를 보면 1971년까지는 한국 바둑의 대부이시자 당대의 1인자이신 조남철 선생님과 그 뒤를 이으신 김인 선생님이 활약하시다가 나이의 한계에 부딪쳐 서서히 시들어 가시고, 그 뒤를 이어 된장 바둑 서봉수 사범이 4회부터 7회까지 연속 4번의 타이틀 보유자가 되는데 이런 이유로 서봉수 사범을 영원한 명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병역문제로 일본에서 돌아와 군에 입대하였다가 제대한 바둑황제 조훈현(9세로 우니나라 최연소 입단자)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때부터 조훈현과 서봉수는 한국바둑의 쌍두마차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조훈현과 서봉수는 20151월 현재 369국을 두어 조훈현 기준 250119패로 조훈현의 승률이 67.75%3판 중 2판은 조훈현이 이겼으며, 이들의 마지막 대국인 2015.01.26. 대국에서도 조훈현이 이겼다) 이렇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바둑을 이끈 조훈현과 서봉수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피 말리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때(사실은 조훈현의 독주에 서봉수가 도전하는 양상이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절대고수가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훈현의 내제자 이창호(11세로 조훈현에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입단).

이창호의 등장으로 이제 한국 바둑계는 조서의 대결에서 스승과 제자의 대결로 무대가 옮겨진다. 1988년 바둑왕전 우승을 시작으로 스승인 조훈현에게서 타이틀을 하나하나 뺏어오니(1990년에 국수위 및 최고위, 1991년에 명인 등등) 이제 한국 바둑계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시대였다. 그러나 장강의 앞 물은 뒷물에 의해 밀려나듯이 조훈현은 제자인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기니드디어 이창호는 한국 바둑계의 아니 세계 바둑계의 제1인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이창호가 조훈현의 제자로 조현훈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바둑수업을 받을 때였으니 스승인 조훈현의 입장에서야 청출어람이니 희비가 엇갈렸겠지만 이창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조훈현의 부인의 입장에선 자기 남편의 타이틀을 하나하나씩 빼앗은 배은망덕한 놈(?)으로 비쳐지지나 않았는지!

 

이렇게 조훈현과 이창호가 한국바둑을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 또 한 소년이 웅비의 뜻을 품고 칼을 갈고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세돌이라는 괴물이었다. 그의 성장에는 친형인 이상훈의 힘이 컸다. 자기도 프로기사이지만 자기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한국 바둑의 높은 벽(이창호라는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어린 동생의 번득이는 기재를 발견하고는 과감히 자기를 포기하고 동생을 지도하기에 이른다.

이세돌은 형과 수많은 바둑 팬의 기대에 부응하며 당대의 1인자인 이창호를 꺾고 이제 새로운 한국의 1인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 후론 춘추전국시대가 되어 박영훈최철한 등이 나타나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이들도 제1인자로 등극하지는 못하였다.

작금이야 그들의 뒤를 이어 박정환(현재 세계랭킹 1)김지석(현재 세계랭킹 2) 등이 기세를 떨치며 한국 바둑계를 이끌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명인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다.(박정환은 2015년에 국수위에 등극함)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을 요약하면 명인위를 쟁취한 기사들은 한국 바둑의 고속도로를 처음 낸 조남철 선생님과 그 도로를 처음으로 신나게 달렸던 김인 선생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된장바둑 서봉수, 바둑황제 조훈현, 돌부처 이창호, 타개의 달인 명수 이세돌 및 박영훈과 최철환 등 7명에 불과한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춘추전국시대 하에서의 박영훈과 최철환은 제외) 분명 한국바둑의 계보가 그대로 그려지니 명인위가 국수위보다 그 권위가 덜하다!’라는 나의 생각에 분명 무엇인가의 오류가 있는 것도 같아 이 글로 나의 생각을 대신 한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1984년에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프로로 입단하여 1982년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유창혁(1966년생)은 세계대회 그랜드슬렘(1993년 후지쓰배, 1996년 응씨배, 2000년 삼성화재배, 2001년 춘란배, 2002LG)을 달성하는 등의 한국 바둑계의 큰 거목이지만, 그가 국수위와 명인위를 한 번도 움켜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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