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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은 살아있다.
1994 한국 프로듀서 대상 , 교양다큐부문 작품상 [장덕수 MBC]


내용이 아주 깁니다. 읽어보시면 좋은 것 같아 올려봅니다.
옛날에 비해서 현재 거금도의 갯벌도 많이 줄었들었고, 머지않아 그 옛날의 넉넉함을 느껴보는 날이 오지 않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갯벌.... 우리네 삶이 버무려저 있는 거금도의 미래입니다..........


르포-해남만에서 강화도까지

                     서해안 갯벌이 죽어간다.- 이현숙/환경전문자유기고가

고흥군


전남 고흥군  해창만은 일찌감치 1978년 매립이 시작되어 이미 농사를 짓는 곳으로 농어촌공사가 펴낸 '한국의 간척'의 간척자원지도를 보면 맨 아랫쪽에 자리잡고있다. 허구많은 간척지 중에서 맨 먼저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  곳이 별로 많지않은 매립완공지구여서다. 섬과 섬을 3개의 방조제로 이어 800만평의 간척이 이미 끝난 곳.

언덕진 도로에서 내려다보니 수로가 나있는 해창만 들판은 말그대로 광활했다. 한때 그곳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기억뿐이었다.

"둑은 20년전에 막았어도 개답공사는 늦었지라우."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최순채씨(59세)는 1200평의 간척지를 임대내어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 땅에서 나는 소출은 30가마의 쌀. "한 해 22만원의 도지를 내고 나면 남는게 별로 읍쥬." 그의 수지타산이다. 간척되고 나서 살림살이가 전에 비해 어떤지 궁금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안막았으면 엄청 발전했을거라고들 하지라우." 석화, 꼬막, 반지락, 낙지등이 지천으로 깔렸다던 그 갯벌을 알 리 없는 내게는 좀체 실감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의 굵게 주름팬 얼굴은 진지했다.

물이 썰어서 갯벌이 드러났건만 마을은 쥐죽은 듯 적막했다. 갯벌에는 고동을 잡는 아주머니 한사람이 눈에 띨 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가려고 뻘밭을 내딛으면서는 발이 푹푹 빠졌다. "있어야 잡지라우. 석화니, 조개니 씨알이 없그만요." 그녀가 들고 있는 바께스를 들여다보니 한웅큼의 고동이 있었다.

배수갑문을 지나 방조제 옆에 자리잡은 상오마을 선창에서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는 전철순씨를 만날 수 있었다.  "갑문이 3개 있는데 한달에 대여섯번씩 한꺼번에 열어제끼기라도 하면 농약 냄새가 코를 찔러요. 주낚을 놔서 장어를 잡아먹고 살았는데 낙자가 한마리도 찾아볼 수가 없구만요. 장어는 낙자를 먹고사는데.." 이곳 사람들은 낙지를 낙자라고 불렀다. "뻘이 다 죽어버렸어요. 고기들이 알을 까러 올라오던 덴데..테레비 보니까 시화호에서 데모들 하고 그러든데.. 우리 마음도 똑같애요. 즤들이 농사를 짓거나 말거나 갑문을 못열게 하고픈 맴이 굴뚝같지라우" "배를 타고 나가면 20-30만원씩은 족히 벌었는디..바다를 막지말고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죄다 부자되었을 거지라우. "

그제서야 풍어제를 올리며 흥겹던 어촌마을에 깃든 정적이 황폐화된 바다와 연관되어있다는 감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 고흥군에서는 지금 또하나의 대간척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반으로 접으면 해창만과 겹칠듯 맞은편에 자리잡고있는 고흥만이었다. 볼썽사납게 파헤쳐진 돌산을 옆에 끼고 덤프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들락거리며 방조제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공사판 옆자락으로 돌아가니 풍류마을이 나타났다. 느티나무 그늘밑 평상에 나와있는 노인네들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옛날같으면 할매들도 갯바닥에 나갔을거구만. 나가면 다 돈벌이였제. 요새는 잔돈푼이 다 말랐소. 후회나 죽겄소." 군에서 마을로 동의서를 받으러 다녔는데 관에서 하는 일이니까 멋모르더라도 그냥 도장들을 찍어줬는 데 그게 자신들을 얽어맬 줄은 몰랐다고 했다. "배가 없는 사람이라도 꼬막 낙자 석화 반지락 잡아먹고 살았어. 하루 수십만원 벌이가 그닥 어렵잖았드랬는데... 이젠 품팔러 나가. 여긴 농토가 보잘 데 없는 마을이거든"

수산중개업 경력이 20년이나 되는 송광자씨의 인생살이는 오그라붙는 이 지역 경기를 잘 보여준다. 고흥만 간척공사가 시작되기 바로 전인 89년에 고향인 이 곳에  내려온 그녀는 '남해수산'이라는 상호를 가지고 이곳 수산물을 노량진수산시장에 직거래하는 일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 대여섯평되는 수조는 텅비어있다. "여기 출하물은 서울서도 알아주는 상품이었지. 낙지, 오도리는 최고였어. 자연산 피조개는 신선하기로 소문났어.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었지." "이제 쫄딱 망했어. 쪽박차게 생겼지. 자살하려고 바다에도 몇번 들어갔었지. 저걸 확 터버리고싶은 생각뿐여. 미쳐불갔당게" 여걸풍의 풍채와 괄괄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울화통이 치밀어 어쩌지 못하는 가운데 방조제 쪽을 노려보았다. "물이 흐르는 것을 막아버리면 썩게 되어있어. 저 막은 물을 트면 여기가 다 죽어. 고기가 없게된다구." 그녀는 혼자소리로 절규했다.

방조제 안쪽 마을인 엄포의 노인회관에는 노인 대여섯사람이 모여있었다. "폐촌이 되어부렀소. 전에는 모두 바다로 뛰느라  회관이 텅비었었는 데 이젠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까 이렇게 회관이 북적거린다우. 바다 안뛰면 부촌이 못되여. 전에는 농사를 안지어도 다 먹고살었거든." 송갑동(73세)씨의 말끝을 이어 노인들이 한마디씩을 했다. "농사보다 갯바닥에서 훨씬 먹고살만 했는디.""이럴 줄 알았으면 돈몇푼받고 동의해는 게 아닌데..지금 다들 후회한다우.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지었지."

어민들의 절망과 울분이 해창만, 고흥만을 휘감고있었다. 그러나 농어촌공사에서 펴낸 '한국의 간척'을 펴보면 고흥만의 대여섯배가 넘는 보성만 전체가 매립예정지구로 그려져있다.




해남만

물이 썰기 시작한 해남면 고천암 방조제 바깥 바다. 두어시쯤되면  조개를 캐는 이들이 나올 것이라는 구멍가게 아저씨의 귀뜸을 듣고 갯벌에 나가봤으나 헛걸음을 쳐야했다. 다만 덤장에 걸린 고기들을 추스려 그릇에 담는 최봉기씨(53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해서 먹고살 수 있겠어라우?" 그물을 털어넣는 그의 얼굴은 기운이 없어보였다. "이래봤자 팔지도 못하지라우. 그냥 저녁거리나 되지" 그릇에는 손가락만한 고기들이 담겨있었는 데 거의 흐물흐물해보였다. "이틀에 한번씩 이렇게 바다에 나오긴하제. 해먹을 게 없응께. 둑을 막고나서 바다가 베려버렸구만이라우. 그래 다들 떠나제."  그는 방조제 바깥에서 가장 가까운 가좌동네에 살고있는 데 한 70여 가구쯤이 살고있다고 했다. 전에는 130-140가구쯤이 살았다니 절반쯤은 떠난 것이다. 바다를 막으면서 그도 보상이랍시고 1천만원가량을 받았지만 그 돈을 밑천삼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걸루다 어디가서 방한칸을 얻을 수 있겠수. 돈이 있나. 배운 게 있나. 기술이 있나. 가진거라곤 고기잡아 먹는 짓뿐인데.."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그를 따라 마을에 오니 그의 친구뻘 되는 이들이 와있었다.

고개넘어 관동마을에 산다는 그들도 돌아가며 최봉기씨와 입을 맞춘듯한 소리들을 한마디씩  했다. "뻘이 좋아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가 수태 잡혔었지라. 낙자,게, 고막, 반지락, 맛이랑..저기 산밑에까지 났어라. 엄청나게 있었어라우. 참말로 좋은 데였구마이라우. 배가지고 나가 한물에 340만원어치를 한 적도 있었당께." "이거 막아가지고 망해버렸어라우." "날마다 고기잡을건디.. 지금쯤 갯바닥에 나가 있을 땐 데 이렇게 할일이 없어져버렸어라우"

93년부터 군에서 240만평에 대한 가경작권을 나눠주었지만 방조제 안쪽 지선어민들에게만 가경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바람에 그나마도 그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가경작되고 있는 땅에서는 평당 1.2킬로그램의 쌀이 생산돼 평당 1.5-1.5킬로그램이 생산되는 일반 경작지에는 아직 수확이 못미친다"는  해남농지개량조합 이재우 간척사업소장의 설명을 따르자만 농사를 짓게된다고 해서 먹고살만해지란 보장도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은 손놓고 있느니 농사라도 짓는 편이 낫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1천2백만평 간척지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암울한 절망의 원흉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영산강의 녹색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겨울에는 낙자는 발로 차고 다닐정도로 많았지라. '목포 세발낙지'라는 것이 다 여기 바다에서 났던 거들랑요..."그많던 세발낙지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전남도 자료에 따르면 낙지의 주요 서식처인 해남만매립으로 세발낙지는 구경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금호방조제 공사가 시작되던 89년 1300톤 잡히던 세발낙지는 91년에 800톤, 영암방조제 물막이가 끝난 93년에는 400톤 밖에 잡히지않고 있다. 앞으로는 매립이 안된 전남도의 다른 지역에서 100톤쯤이나 잡힐 것이라고 한다.

햇볕을 받아 번쩍거리는 둑은 멋없이 길기만했다. 섬을 잇는 2개의 금호방조제가 2킬로, 영암방조제는 1개가 2킬로 가량 되었다. 둑  바깥 갯벌에 나온 사람이 두엇 눈에 띠어 둑에 내려서 말을 붙여보았다. "안주감으로 웅어를 잡아도 석유냄새가 나 먹을 엄두가 안나지라. 애들이랑 그냥 놀이삼아 잡아보는거요."

바람에 찰랑거리는 영암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요것이 완전 쓰레기통이요. 1지구 같은 데는 악취가 엄청나요" 별암어촌계장이 지목한 데가 바로 여기였다. 방조제 끝 배수갑문에 도달했다. 열어놓은 갑문에서 시커먼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천지에 진동하는 썩은 닭똥냄새가 속을 뒤집어 헛구역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시화호만 썩은 것이 아니었다. 저 썩은 물이 휩쓸고 갈 바깥 바다가 멀쩡할 수 있을까? 영산강이 4대강 가운데서 가장 부영양화가 심한 강이라는 딱지가 달래 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암군, 해남군내 어족자원의 산란지를 개발하면서 농업진흥공사는 대체어장 하나 마련치않고 밀어붙였당께. 우린 썩은 냄새만 맡고 살란말이지." 영암호 갑문 바로 옆 어유도횟집 주인 황보이수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거푸 술잔을 털어넣었다. "자자손손 수백년두고 여기를 근거지로 살아온 어민들의 생활터전을 빼았.."그는 말을 잇지못했다. 19살부터 마흔살이 되도록 고기잡이를 하다가 87년 어유도횟집은 낸 그는 생애 최대의 황금기를 맞았다고 했다. "목포에서 '어유도 가자'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라. 당시 하루 7-80만원씩도 벌었으니까." 방조제 공사가 본격화되던 90년부터 그의 가게는 기울기시작했다. "금호방조제 물막이가 끝나니 아예 고기가 없어져버렸어라우. 게다가 93년부터 한라중공업이 매립하면서 해저모래를 준설선으로 긁어가버려 산란지를 아예 싹쓸이 해버린거라. 고대구리망이나 삼마이를 놔도 안잡힌당게." 낙지, 오도리등 특산물이 없어져버리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판에 회를 먹으로 오는 이는 없을 터였다. "여기까지 수조가 놓였었당께." 그는 꽤 큰 식당의 절반쯤을 가르켰다. 갑문 옆에는 한때 만선으로 흥청거렸을 그의 배들이 무심한 달빛 아래 흉흉하게 놓여있었다.

보상이 턱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관행어업의 경우 3인가족에 150만원이 책정되었다. 어장 허가권을 가진 경우 150-2200만원을 준다고 했다. 1년 소득이 5천-7천에 이르는 이들에게 아무리해도 납득할 수 없는 액수였다. 94년 인접 5개군 어민의 뜻을 모아 난생처음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지만 변호사가 돌연 농업진흥공사측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닭좇던 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농어촌진흥공사의 한 관계자는 사견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어민들이 딱한 처지인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자손손 생명줄을 끊어놓는 댓가로 고작 기백만원씩 보상한다는 것은 사회정의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사람들을 달래야할지 어째야할 지 모르겠다"며 일선 실무자로서 난감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 실토했다.

그들 어민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바램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관행어업이 보상되기 전까지라도 간척지에서 가경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 가경작이란 간척지의 내부 경지정리가 끝날때까지 임시로 농사를 지어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손바닥만한 꿈조차도 그들에겐 그닥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경작 농업 역시 자본있는 외지인이 들어와 하고 있죠. 가경작을 허용해도 소유권이 없으니까 농협에서 융자 한 푼 받을 수 없고 그러니 투자를 할 수가 없지라. 외지인들이 들어와 뭉텡이로 농사를 짓고 어민들은 고작 품팔이 노동으로 살지라. 돈있는 이들이 10-15헥타(3만-4만5천평)씩 대규모로 농사를 짓지라."  농업진흥공사 영산강사업단의 관계자는 "영산호 일대 5천헥타의 땅이 가경작되고 있으되 그 권한은 군에서 행사하고 있다"며 "서로 농사지으려, 한평이라도 더 차지하려 드는 신청자가 넘치는 데 대부분 3헥타이상 15헥타까지 공동경작한다"고 밝혔다.

땅한뙤기가 아쉬운 어민들. 그러나 간척지 중에는 이미 공단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농경지조성'이란 농어촌진흥공사의 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있다. 89년 대불공단 자리로 200만평을 내준 것. 그 경위를 농어촌진흥공사 관계자는 "대통령지시로 원가도 못받고 빼앗기다시피 토지개발공사에 넘겨주었다"고 설명했다. 대불공단말고도 앞으로 3백만평이 더 다목적용지로 전용될 계획으로 잡혀있다. 어떻든 어민들이 피눈물을 쏟으며 빼앗긴 바다는 그들의 농토로 돌아오기는 커녕 그들로부터 점점 멀어져만가고 있는 것이다. 농진공은 '국가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치장을 했지만 국가기관이 땅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민들을 초토화시키면서 진행되고있는 영산강 개발사업. 1차,2차,3차로도 성에 안차 조감도에는 아직 개발시기도 확정되지도 4단계, 5단계 사업이 버젓이 나와있다.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목포, 무안,신안, 함평, 영광에 걸치는 4단계사업은 19킬로에 이르는 방조제를 쌓아 1억평에 이르는 땅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전남 영광에서 전북 고창에 이르는 해역을 매립하는 5단계사업의 대상은 4천5백만평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4단계 사업예정지 무안반도로 떠났다. 점점이 박혀있는 섬들에 둘러싸인 바다는 자못 호수처럼 고즈넉하기만했다. 지도를 펴놓고보면 돌맹이 몇개만 던져넣어도 채워질듯 바짝바짝 붙어있는 섬들. 그래서 이제껏 위정자들이 간척에 그토록 군침을 흘려왔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 자락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어민들에게 '그 돌덩이 몇개'는 생계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재앙을 몰고온 것이기도 한다.

국립공원인 변산반도를 옆에 끼고 곰소만은 갯벌을 홀랑 드러내고 있었다. 노을이 지다못해 갓 어둠이 깃들 찰라의 그 갯벌은 광활함과 멋드러진 갯고랑의 굴곡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곰소만. 영광원전에서 쏟아내는 초당 250톤의 온배수가 여기 이 구비까지 휩싸고 돈다는 곳. 그물을 꿰매느라 여념이 없는 젊은 아낙네는 이렇게 말했다. "20일뒤면 김장새우잡이가 시작되는데 올해는 어쩔랑가 몰라요. 해마다 고기가 안잡혀 전보다 절반도 못잡구있구만요. 인건비, 기름값도 안나오는 배가 쌨어요." "내가 한 국민학교 때부터 저기까지 막는다는 얘기를 들었수. 언젠가는 막을 것이여. 내 세대 아니더라도 쟤들 대에는 매립될거여."곰소마을에서 바지락양식장을 한다는 아저씨는 초등학교에 다닐법한 아들을 가리켰다.




새만금,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인가.

오목조목 드나듬이 빼어난 해안선만이 아니라 산자락도 수려해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반도 앞바다에서는 전 세계에 전무후무한 대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른바 새만금사업.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굽어들어간 해안선을 방조제로 너댓개의 섬들을 이어 직선으로 바꾸고 매립을 하려는 것이다.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해안선은 33킬로미터의 쭉뻗은 방조제로 대체된다. 그렇게 가로막힌 바다는 1억2천만평 나뭇의 땅을 약속한다. 전주시의 2배, 여의도의 140배, 부산시 면적에 버금가리라는 이 간척지는 애초 농업용지를 조성하기위한 것이었으나 "우주항공센터와 항만시설, 국제공항을 유치해 산업의 뉴프런티어를 제공하겠다"는 전북도의 야심찬 구상의 도전을 받고있다.

대형 덤프트럭들이 쉴새없이 오가는 가운데 방조제 바깥 쪽 바다는 물이 썰어 갯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 썩어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라. 굴이고, 반지락이고 백합이고 하여간에 뭐든 많았는데.." 합구부락에서 차를 기다리던 김영득(64세) 아주머니는 억누를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여그 사람들 바다만 뜯어먹고 살았는디말이요. 그렇게해서  애들 대학까지 가르쳤는디 이제는 대학을 넣지도 못하게 생겨버렸구마. 겁나게들 잡아갔꼬마. 물때에 나가면 몇만원은 거뜬히 벌었지라. 생금밭이었는디.." 파를 잔뜩 인 채 변산해수욕장행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는 말문이 막히는가 보았다.

이 갯벌에서 조개류를 채취해 먹고살던 이른바 관행어업을 하던 이들은 200-1천만원꼴로 보상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신고를 늦게한 사람들은 한푼도 못받고 나앉은 상태였다. 김양식을 하던 이들도 헤타당 6-7백만원씩 보상이 나왔지만 흙탕물때문에  자라던 김이 죽어버린 것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보상을 준다고 해도 우리는 큰 타격이여. 자손만대 먹고살건데. 앞으로 개발돼 좋은 일이 있을랑가 몰라도 우리는 망해버렸어라우." "전북 200만 도민의 한결같은 숙원사업이었다"는 유종길 전북도지사의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방조제 안쪽 갯벌은 채 굳지않은 토사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다. 너댓사람쯤이 조개를 잡고있었다. 부산에서 손주가 놀러와 데리고 나왔다는 아주머니는 부안읍내에서 왔다고 했다. 토사에 묻힌 바지락 몇 알을 캐내었지만 국그릇만한 바구니를 채우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터였다. 당초 20킬로까지 뻗어있던 이곳 갯벌에는 1밀리미터되는 저서생물 66가지가 서식해 국내의 다른 갯벌보다도 1.5배나 되는 다양한 생물이 사는 기름진 바다였다.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개맛이 이곳에 몰려 사는 것이 알려져 세계 생태학계의 이목을 모으기도 했다. 그 풍요로운 이 갯벌이 토사가 쌓여 썩고 있는 것이다.

동진강 하구쪽으로는 이미 60년대에 간척이 완료된 계화도 간척지가 펼쳐있었다. 동진어촌계 참사 강영수씨는 "90년도 위판고가 20억원이었는데 해마다 떨어지더니 지난해는 8억으로 뚝떨어졌다"며 "대체어장도, 전업대책도 없고, 쥐꼬리만한 보상금만 달랑 쥐어주고 몰아낸다"며 "어민들을 희생으로 삼는 매립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못박았다. "같은 면적일 경우 바다는 논보다 소득이 더 많다"는 그는 "계화도 특산품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이 이제는 조류방향등의 변화로 전혀 안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다시 새만금사업으로 거듭되고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매립지를 트는 외국의 사례를 들며 "2-30년 뒤면 다시 트게 되어있다"고 장담하다시피했다.

10억톤의 물을 공급할 새만금호의 규모는 시화호의 3배가 넘는다. 그러나 벌써부터 조짐이 좋지않다. 시화호의 악몽이 여기서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이 벌서부터 슬슬 고개를 내밀고있는 것이다. 새만금 간척지로 흘러들어가는 만경강,동진강은 지난해 각각 기준치의 최고 12배와 4배를 넘는 질소로 오염되었다. 인에 의한 오염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환경부 고위관계자가 "새만금호는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으로 보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난 적이 있다. 그러나 유종근 전북도지사는 "절대로 시화호 같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운다는 우리의 의지가 확고하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검푸른빛으로 부글부글 끓고있는 군산시에서 만경강으로 흘러드는 한 하천을 보니 시화호의 우수토구에서 쏟아져 나오던 검붉은 폐수들이 떠올랐다.




홍보지구  어민들의 성토  "농진공은 없어져야할 조직"

이름이 알려지기로는 아무래도 대천해수욕장이 더 잘 알려져있는 보령시. 충남 홍성군과 보령시를 아우르는 해안을 메꾸는 이른바 홍보지구 간척이 이뤄지고있었다. 천수만과 맛닿아있어 이미 서산A.B지구 간척으로 작살난 바다에 다시 간척이 들어온 것이다. 1지구에는 땅 한끝에서 툭 삐져나온 방조제가 상당히 진척되었고 2지구는 배수갑문을 세울 골조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보상은 거북이 걸음이었다. 대천 어민후계자 협의회 이신복회장(46세)은 "선보상 후착공이라는 원칙이 법에도 살아있는데 보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91년 착공되었지만 보상을 미뤄 바다농사를 망친 어민들은 살길이 막연해졌다고 했다. 피해보상을 위한 용역결과가 나온 것이 92년인데 농진공에서는 그나마도 적게 주려고 이런저런 꼬투리를 달면서 '끝없는 분쟁' 속에 몰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사람들 석화 구경하기 힘들게 생겼시다." 천북면 신죽리에서 3대째 투석식 굴양식을 해온 김용제씨는 간척사업의 귀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충남에서 1호로 굴면허를 따고 3대째 대물림으로 이 업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날때부터 이 일을 해왔다는 그는 '시설물을 보상에서 제외한다'는 시비에 말려 아직껏 한푼의 보상도 못받고 있다. 그만이 아니라 인근 빙도 인근 해역을 삥둘러가며 자연산 굴을 생산해온 모든 어민들이 같은 처지다.

맨손어업을 해온 1천292세대도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군수가 그들의 어업활동을 인정했는데도 신고필증을 가지고 있지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면허를 내준 도지시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조건없이 면허를 반납한다'는 조항에 걸려 100억원되는 보상비를 못받고있는 어업권자들도 있었다.

"간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은 불법일뿐만아니라 공정거래도 아니지만 너무도 일방적 플레이다. 약관에 대한 심의를 요구하고 싶지만 정부기관과 붙으면 판판이 당하니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는 이신복씨는  "자꾸 막아대는 바람에  먹이사슬이 파괴돼 어민에겐 날로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힘가진자는 마치 어민들이 보상병에 걸려 보상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매도한다. 당하는게 어민인데 그런 적반하장이 있을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하는 그는 "어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농어촌진흥공사는 없어져야할 조직"이라고 성토했다.

보상을 제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바다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다. 간척공사로 형성될 두개의 호수에는 축산단지인 천북면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수가 흘러들어갈 터인데 썩지않을 도리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썩은 물을 방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어민들은 끔직해했다. "불보듯 뻔해요. 시화지구에서, 서산 A.B지구에서 이미 겪은 일을 여기서도 꼭 겪게될 거예요"




천수만을 맴도는 4만 어민의 원혼- 정주영의 서산A.B지구 간척지


천수만의 가슴팍께를 자른 듯 1/3을 매립한 서산 A.B지구는 광활하다. A지구를 가로지르는 방조제는 길이가 7킬로. 방조제 좌우로 섬하나 없이 휑한 수평선이 나타나므로 간월호는 호수라기보다는 망망대해로 보인다. 방조제 중간에는 정주영씨가 길이 200미터, 폭 30미터되는 유조선으로 물막이 공사를 끝냈다는 설명문이 적힌 입간판이 '기술의 현대, 세계속의 현대'를 뽐내고 있었다. 4천7백만평의 간척지, 1300만평의 담수호.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이 한 개인이라면 그는 스스로를 대단히 대견스러워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그러나 어민들은 하나같이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소박한 어민들의 꿈을 뒤집고 짓밟아버렸지라우"

"16년 전쟁이구만유."천북면 학성리 사는 정영희씨(53세)는 정주영씨를 상대로한 끝없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천수만은 다 결딴났지요. 그런데 김양식장에 대한 보상에 있어 대산지구는 1책당 75만원, 광양지역은 90만원이었는데 정주영씨는 25만원밖에 쳐주지 않겠다고 버텼지요. 83년 물막이가 끝나고도 3년을 속아지냈어요. 유조선이 가는 것을 보고난 그 이듬해 봄이되자 김이 싹 죽데요. 그런데도 현대에서는 3년이 지나면 생태계가 변화해 다시 좋아질 수도 있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그래서 피해가 더 막심했지요. 건지는 건 없는 데 3년을 내리 투자를 했으니 말예유."

조개류를 캐던 관행어업에 대한 보상도 김양식의 경우처럼 허무맹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많게는 가구당 250만원에서 적게는 15만원이  고작이었다. 1가구가 갯벌에 나가 한나절만 게를 잡아도 벌수있는 그 돈을 보상금이랍시고 공탁해놓고는 끝내려든 것이다. "10년넘도록 어장에 대한 인.허가도 일체 안내주었지요." 그는 자기만이 아니라 동네사람들 모두가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사정사정을 해서 정부미를 얻어다먹고 직원들이 모금해 준 돈으로 버티면서 공사판에 나가 품을 팔기도 했쥬." 그러다가 끝내는 뿔뿔이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사실을 그는 이렇게 입증하려들었다. 그가 6년동안 육성회장으로 있던 230명의 학성초등학교가 폐교되었고 그 옆의 천덕초등학교에서는 지금 고작 10여명 나뭇이 다닐 정도로 쪼그라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듣노라니 느닷없이 20세기 한국에서 생긴 '간척난민'들의 행렬이 눈에 밟혀왔다.

95년 농림수산부는 간척지를 준공해줌으로써 마침내 정주영씨에게 5천만평에 이르는 황금알을 거머쥘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은 못되더라도 기다린 만큼은 되야해요." 정주영씨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보고 "당신의 평화로운 노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어민들이 피눈물을 흘렸는지 아느냐?"는 편지를 띠우고 싶었다는 그의 부인의 담담한 다짐이었다.

방조제로 막은 2개의 호수 부남호, 간월호도 다른 담수호들처럼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김발이 하나도 없지요. 포자가 붙었다가도 그냥 썩어내리는 걸유. 깨끗한 물이 왔다갔다해야 하는디 어디 붙어있을 재간이 있남유." 그날도 배를 타고 한 30분쯤 나갔다왔다는 정영희씨는 "방조제 앞 바다는 온통 밤색물"이더라고 했다. 캐온 반지락을 까고있던 동네 아낙네들은 "갯물과 만날 때보면 물색깔이 검붉다"고 했다. "둑 막기 전에는 적조가 없었는데 막고나서는 1년에 2-3번식 적조현상이 온다"며 "해초가 있어야 잔 물고기가 서식하고, 산란할 수 있는데.. 해초가 무성했던 바다가 16년이 지난 지금 해초라곤 없슈" 김양식을 했던 오세태 주민피해보상대책위원장의 말이다. B지구 부남호 방조제 옆에 붙은 창리마을 박용신 어촌계장도 "먹구름이 낀 듯  간장빛 물띠가 오락가락한다"고 같은 말을 했다.

부남 방조제 밖 선창에는 배들이 즐비했다. 한 주민에 따르면 고기잡이배는 거의 없고 거의 가두리양식장에 오고가는 데 쓰인다고 했다.썩은물을 코앞에 두고 우럭을 키우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92년, 94년, 그리고 지난해 95년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죽은 고기를 1톤트럭으로 스무대는 실어다 묻었쥬. 웅덩이를 파고 묻고 파고 묻고 얼마나 했는 지 몰라요." 둑방에 나와앉은 한 주민은 "올해도 서서히 죽어나자빠지는 고기들이 늘고 있다"며 울상이었다. 간척 뒤 주민들이 매달리기 시작한 이 가두리양식이 언제까지 무사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B지구로 들어서니 밭을 갈아 뒤집어놓은 듯 했다. 더 들어가보려고 했지만 큰 바위로 길을 막아놔  드나들 수 없게 되어있었다. 한 주민은 그 B지구에서는 "전혀 벼농사를 짓지않고 있다"고 전했다. 논농사를 짓겠다고 면허를 내놓고 전혀 딴전을 피우고있는 셈이었다. 현대측은 '벼농사가 안된다'는 이유를 들고있다. 그러나 애초 면허를 받을 때와는 달리 논대신 밭으로 조성해놓고 정부의 눈치를 보다가 막판에 부랴부랴 논으로 조성한 이 지구에서 벼농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토목학과를 전공했다는 서산환경운동연합 김익배간사는 "간척지에는 복토를 40센치미터를 해야하는 데 제대로 안해 농사가 안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측은 준공이 되기 전부터 간척지의 용도를 변경해 공장지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호시탐탐 내비쳐왔다. 92년 대통령후보로 나선 정주영씨는 당선되면 이 지역에 공단을 유치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자민련의 변웅전후보도 이 지역을 개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생활기반을 잃고 객지로 흩어질 위기에 처한 500세대 만이라도 농사를 짓게 땅을 임대해달라"는 주민들의 메아리없는 간청만이 천수만을 떠돌고있다.




줄줄이 공단으로 내준 아산만 갯벌


  "곧 떠나구만요." 서산시 대산읍 대죽3구. 배를 손질하던 동네 아저씨는 이 앞바다에 매립면허가 떨어져 마을 전체가 떠날 날이 멀지않았다고 했다. 아직 보상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까뭉개진 붉은 산 자락에 연신 꿈적이는 포크레인과 높다랗게 흙을 채운채 질주하는 대형덤프트럭은 본격적인 매립공사가 멀지않았음을 엿보게했다.  "제대로 이주할 수 있는 집은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지유." 김춘수씨(40)는 76세대가 사는 이 마을에서도 다른 데처럼 '300-500만원의 보상비'가 나왔다고 말했다.

산 밑 갯벌에서는 대여섯명의 아낙네들이 호미로 조개를 캐 담고 있었다. 갯벌을 걸으니 살짝 석유냄새가 풍겨왔다. 갯벌 왼켠으로 보이는 공장구조물은 현대정유, 현대석유화학, 삼성석유화학등 재벌 3사가 200만평의 갯벌을 매립하고 들어선 대산공단의 한 자락이었다. 뱅어포로 이름을 날리던 이 바다는 7년이 지난 지금 표준해수의 10배-100배가 넘는 납, 크롬등 중금속이 떠다니는 바다로 변한 지 오래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갯벌마저 같은 운명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내다팔면 한 2만원어치는 될거구만유. 전에는 말도 못하게 많았었슈." 어느 간척지에서나 듣던 소리를 또 듣고있었다. 조개캐던 아낙네들은 짐을 챙기더니 버스가 들어오자 우루루 몰려갔다.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고 대산읍내에서 여기까지 조개를 캐러온 이들이라고 했다.  "그나마 매립되면 저 사람들은 어디가서 조개를 캘까유? 손끝싸매고 나앉는 수 밖에 없쥬"

차머리를 돌려 한 5분쯤 달리니 대호방조제가 나왔다. 방조제들은 하나같이 길었다. 이것도 7.8킬로미터나 되었다. 방조제 주변으로 땡볕을 피해 놀러나온 이들이 눈에 띠었다. 배들도 백여척 남짓은 될성 싶었다. 다른 간척지보다 사정이 좋은 것일까? "괴기가 없어유. 먼데가서들 잡아오는 거지. 인천까지 간다우." 허리가 꼬부라져 지팡이를 진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야 이곳도 '역시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조제 바깥 바다쪽으로 가두리양식장도 보였다. 아나고를 키운다고 했다.

방조제 안쪽 대호호에는 짙은 연두색 물띠가 폭을 이루며 떠있었다. 호수물 가까이 가보니 하수구 냄새가 풍겨왔다. 이 물을 먹고도  아나고는 탈없이 클 수 있을까?

대호방조제를 지나 머잖은 곳에 석문방조제 2개가 잇닿아 있었다.  이것은 대호방조제보다도 훨씬 길었다. 조개를 트럭으로 옮기고 있는 몇명의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송산읍에서 바지락을 캐러왔다고 했다. "여기저기 다 우리 갯고랑이었는디..이제 조개도 없어유." 인근 대호방조제, 삽교천방조제, 아산방조제등이 그들을 몰아내는 바람에 갯벌을 찾아 떠돌게 되었다는 말인듯 싶었다. "개발된다고 하지만 먹고사는 데는 백번손해여."

95년 석문호가 준공되고 간척지 이용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이곳 주민들의 반발은 조직화되고 있었다. 당진군내 재향회관건물에는 '석문공단, 한보화력 반대투쟁위원회' 플랭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김대희위원장은 "간척지 4백만평에 중소기업단지를 만든다더니 고려석유화학,유공,한보철강등 공해업체만 들어설 판"이라며 "공해업종 밖에 입주할 수 밖에 없다면 공단조성을 백지화하고 당초 매립목적대로 농지를 조성해 피해주민들에게 분양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준공 테이프를 끊고 돌아온 날 박정희대통령이 저격을 받았다고 알려진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방조제는 일찌감치 70년대에 완공된 것이다. 그 뒤 이 지역에는 550개의 공장이 들어서 '서해안개발시대'의 관문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 과실은 어민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차가 하염없이 막히고 있는 삽교천 방조제.  '우리의 젖줄 삽교호를 살립시다' 청년회의소가 내건 이 전광판이 수려한 해안선을 자랑하던 아산만의 오늘을 한눈에 보여주는 듯 했다.




시화지구 간척사업은 '못먹어도 고'인가


'유람선이 떠있고 수상스키가 질주하는 1천8백만평의 호수' 시화호의 장미빛 청사진이었다. 지금 그 허망한 정열이 여지없이 악몽으로 변한 시화지구는 당초 조성키로한 3천만평의 땅을 어떻게 이용할 지를 둘러싸고 관계기관의 저울대 위에 올랐다. 12킬로에 이르는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시화호의 붉은빛과 바다의 푸른 빛이 선연히 갈라지던 물색이 오늘은 그닥 눈에 띄지 않았다. 홍수를 핑계로 그동안 수억톤의 물을 방류해버리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희석했기 때문이리라. 인근 방아머리선착장 주변에 사는 문덕환씨는 "제아무리 홍수때라고 해서 일대가 침수된 적이 없다"며 '홍수가 지면 둑이 터질 지 모른다'는 농어촌진흥공사와 수자원공사의 호들갑을 "제2의  평화의 댐 소동"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바다가 작살난다고 방류를 반대하던 주민들은 닭장차에 잡혀가고 썩은 물은 인천 앞바다를 휩쓸었다. 한 아주머니는 "7월 이후  연이은 방류로 잡히는 물고기가 한 1/10로 줄어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어류의 산란기라 수산법에도 금어기로 정해져있는 7월에서 8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방류해버렸으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는 주민들.

아무튼 시화지구사업게획은 여지껏 표류하고 있다. 물을 공급하기로 되어있던 시화호가 제 구실을 할 수 없어서다. 방조제 끝 배수갑문을 지나 펼쳐진 대부도 구봉갯벌에는 자갈과 토사만 쌓여있고 조개잡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지역도 당초 매립하겠다는 계획이 서 있었다. 그러나 최신 농업유통단지로 만들겠다는 그 계획 또한 시화지구의 농경지조성이 막힌 상태라 지금은 논란을 비껴서있다.

방조제가 한쪽을 걸치고 있는 대부도의 끄트머리 메추리섬에도 매립을 위한 삽질이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한화그룹이 원유인수기지를 세우겠다고 덤벼든 것. 대부도를 들어서면 곳곳에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볼썽사납게 파헤쳐진 산들이 매립에 쓰이는 토석을 가져가는 토취장이다. "이 지역은 경기도의 임해관광단지 조성 계획이 세워져있는 곳" 이라는 대부동장의 설명. 석유기지와 관광단지가 붙어있을 수 있을까?




경기만은 사라지고 있다.


경기만은 전국에서 가장 급속도로 갯벌이 사라지고있는 지역이다. 이런 사정에는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에서 바다를 맞대고 있어 땅장사를 하려는 이들이  눈독을 들이기 쉽다는 지리적 특성도 한몫하리라.

동아건설이 매립한 인천시 경서동 매립지 500만평. 곧잘 '황금알'이라고도 불리는 이 땅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드넓다. 이렇게 넒은 땅이 어느 개인의 땅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심한 나는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은 부를 독차지해도 죄받지 않을 것인가'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 간척지는 벌써 5년째 농사를 짓지않고 놀리고 있다. 잡초만이 무성한 가운데 동아건설 영농사업소가 보였다. 이 사업소 관계자는 "물이 없어 지금은 시험재배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동아가 용도를 변경해 도시로 개발하려드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아매립지가 아니더라도 이미 인천에는 대우매립지, 한독매립지등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매립지가 적지않다. 수도권의 공해공장들을 입주시킨 남동공단도 매립지다. 그래서 인천시에는 이미 이렇게저렇게 매립된 땅만도 3천만평을 헤아린다. 그것도 모자라 인천시는 앞으로 3천만평을 더 매립할 계획이다.

영종도와 용유도를 사이에 둔 갯벌 1400만평. 이곳에 공항이 세워진다. 물막이공사를 끝내 물이 빠진 갯벌에는 죽어나자빠진 맛조개 껍질이 허옇게 뒤덮여 '국토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자연대학살을 몸서리쳐지게 증언하고 있었다.

동죽으로 이름을 날린 송도갯벌 500만평도 토사를 실어나르는 덤프트럭에 길을 내주고 있다. 트랙터를 타고 철조망 담장너머 갯벌로 조개를 채취하러 갔던 어민들이 돌아왔다. 바지락과 동죽이 꽤 많았다. 그러나 위판장에서 만난 동막어촌계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문닫을 날이 머지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인천시는 이 지역에 앞으로 2400만평을 더 매립해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에 위치한 남쪽 갯벌 3천만평. 물이 썰어 툭트인 이  광활한 갯벌은 경기만에 남아있는 마지막 갯벌로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다. 또한 희귀생물이 서식해 환경부가 해양생태계보호지역으로 지정하려들고 있는 지역이다. 이 곳에도 여전히 매립을 꿈꾸는 이들의 혀가 널름대고있다. 갯벌이 둘러싸고 있는 장봉도, 신도, 시도등을 이어 영종도공항과 연계해 개발하겠다는 이른바 화북프로젝트가 올초 고개를 내밀었다가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주춤하고 있는 상태다. 강화도발전연구회 신성식사무국장은 "청정지역 강화도를 강화도답게 지키기 위해 매립을 막겠다는 것이 지역여론"이라고 귀뜸했다. 그러나 지난 연말 동부건설이 이 지역을 매립해 자유무역지대로 개발하겠다는 사업의향서를 제출한 상태고 관련 옹진군, 강화군, 인천시가 뜻을 같이 했다는 얘기들이 파다한 사정에서 이 갯벌의 운명을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오목조목 굽어져들어간 만을 끼고 형성되는 서해안 갯벌은 남미  아마존강 하구, 독일의 북해연안, 미국 동북부 해안, 캐나다 동부등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생태계로 알려져있다. 땅끝 해남에서 남한의 북쪽 끝 강화도에 이르기 까지 어민들이 입을 맞춘듯 한결같이 "물고기 산란지었다","황금어장이었다"고 되뇌이는 것도 그 굽이치는 해안선 자락의 생태적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해안 갯벌을 따라 북으로 중간쯤 올라왔을 즈음 필자에게 서해안 갯벌에 대한 이미지는 바뀌어있었다. 더이상 아름다운 곳도, 풍요로운 곳도 아니고 간척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어민들의 응어리진 신음과 피눈물이 얼룩져있는 곳이었다.

서해안의 지도를 직선으로 바꿔가며 갯벌을 매립해 3.4%의 국토를 확장한다한들 그것이 인간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헛된 백일몽아닌가?



자료출처: http://envi.chonbuk.ac.kr/%C0%DA%B7%E1/envi5.htm

Who's 거금도

profile

갈색 바위, 노랑 모래, 회색 이끼, 초록 나뭇잎,

푸른 하늘, 진주빛 먼동, 산마루에 걸린 자주빛 그림자, 

해질녘 진홍빛 바다위의 금빛 섬, 

거금도

  • ?
    RRRfff 2003.04.25 22:09
    장성호의 댐이나 둑 이름 아세요??
    아시면 좀 가르쳐 주세요..
    장성호, 담양호, 지리산, 섬진강, 무등산, 광주호, 보성강, 나주호, 영산강, 임자도, 영산호, 해남호, 진도, 완도, 노화도, 돌산도에 있는 댐이나 둑 이름 좀 가르쳐 주세요..(알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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