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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동정(桐井) 원래는 산골 안에 금(金)이 매장된 마을이 있어 古羅金(고라금)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연못가에 오동나무가 있고 그 밑에 있는 바위에 솟는 샘이 있다하여 동정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동정, 신정, 성치가 한 마을이였는데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성치, 신정마을로 분리되었다.
2007.05.14 16:48

상고사 고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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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명칭

 위의 부도지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조선’ 의 ‘선’은 피를 신선하게 하는 제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


 조선은 아사달에 도읍했다고 합니다.


 '달'은 뭘까요 ...?

 위의 숙사달, 엄려달, 소루달 등의 명칭들을 보면, '달(達)' 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사는 도시의 의미인 듯 합니다.

 어쩌면, 산에 둥글게 둘러싸인 형태의 도시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마찬가지이고요.

 어쩌면, ‘阿’ + ㅅ + ‘달’ 로, ‘언덕(阿)’ = ‘달’ 의 동격의 의미를 갖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즉, 아사달은, 강 주변 또는 강

상류에 위치한 사람이 살만한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죠.

 ‘朝鮮’ 을 자세히 보면, ‘日’ 자를 중심으로 하여 위.아래로 ‘十’ 자가 있고, 그 우측에 ‘月’ 이 있습니다. 그리고, ‘魚’ 자와 ‘羊’ 자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만주족을 칭할 때의 ‘胡’ 는, ‘朝’ 에서 아랫쪽 ‘早’ 자가 빠진 모양입니다

 미루어 볼 때, 호족은 평양의 북쪽의 이족(夷族)을, 조선은 평양의 남·북쪽의 이족을 의미하는 듯하며,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과

땅, 즉, 경작과, 물고기를 잡고 양을 기를 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할 듯 합니다. 또는, 제를 지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 초기의 영토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산뚱반도에서 발해만 부근, 만주를 거쳐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 북으로는 대황, 서로는 알유, 남으로는 해대,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 단군조선 전 세대를 통하여 보면, 큰 나라는 아홉, 작은 나라는 열 둘로 나누어 천하의 여러 주를 다스렸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출토된 유물도 석기 및 청동기) 고인돌은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한강 이북으로 발해만 연안까지 분포하는 북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평평하고 넓은 형태)과,

그 이남으로 한반도 남부에 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남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굵은 형태) 입니다.

 고인돌의 형태만으로 본다면, 이들이 만들어졌을 고조선 시대에도 위도에 따라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왼쪽 그림은, 5천 년 전의 식물분포도입니다.

당시의 해안선은, 지진으로 침몰했다는 신주를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모습과 비슷할 것입니다.

(해수면은 오히려 현재보다 수 m 높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는 본디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고조선 관련 기록에서도 삼한과 경계가 나뉘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왼쪽 그림으로 보아, 고조선의 영토는 14번의 영역 + 한반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桓(환)’과 ‘檀(단)’이 모두 ‘나무(木)’가 있음을 주목한다면, 당시의 영역이 숲을 중심으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왼쪽 끝은 버어마 근방까지 도달해 티벳 교역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중국 내륙은 교역로인 실크로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의 연대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고조선은 삼한을 비롯한 제후국을 거느리는 중심국가였습니다. 제후국으로부터는 비교적

적은 양 (소득의 1/90) 의 조공을 받고 고조선은 책봉에 의한 제후 지위의 인정이나, 전쟁이나 홍수 등의 재해 발생시

타 제후국으로부터의 지원을 원조해 주는 형태로 1천 년 가까이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고조선의 영토'라는 의미는

'고조선의 본국 및 그 영향이 미치는 제후국의 범위' 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규원사화에서는, 고시씨가 계속 남쪽에 봉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고시씨가 자리잡은 곳이 동남쪽이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치우씨는 남서쪽에 봉해졌는데, 한반도 남서쪽이라면 백제와 같은 경로로 중국 동해안에 진출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지씨는 북동쪽에 봉해졌는데, 척박한 땅이라 유목생활을 하다 보니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일 읍루, 말갈로

불리우는 종족이 신지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문자를 발명한 이의 후손 답게 ‘야만인’ 의 이미지와는 달리 거란족,

여진족도 독자의 문자를 갖고 있었다고 하죠. 이들이 진한, 마한, 변한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전신이 됩니다.

 중국 땅에서는 하나라, 상나라, 은나라, 주나라 등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에, 각 제후국들은 그들 세력의 판도에 따라 중국 대륙

동해안에 진출하기도, 발해 연안으로 후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 말기에는 발해 서쪽의 많은 제후국들이 중국에 진출,

엄국, 서국 등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세력이 강해지면서 단군조선에서 독립하여 중국에 동화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조선이 직접 다스리는 순수한 고조선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 아마도 단군의 아들들을 그 지역에 봉하거나 도읍지를

옮길 수 있었던 위치로, 북방식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요령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이북에서 산동반도 북쪽 발해

연안과 백두산 근방에 이르는 영역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중 경기지방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남이의 환란을 다스린

땅으로 생각되며, 평정 이후 고시씨의 사람들이 옮겨와서 살다가 기자조선 이후 이들이 다시 흩어져 변한·진한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구려 멸망 후의 통일신라와 발해의 영토는 이전의 고조선의 영역에서 한사군이 위치했던 지역을 제외한 영역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즉, 단군조선의 제후국의 영역이죠.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되찾는 부분은 유주에 이르는 본래의 단군조선의

영토의 절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동사강에서 설명되는 고조선의 영토는 동서 5천 리, 남북 7천리이고, 인구는 50만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설명된 삼한의

기준을 따르면, 큰 나라가 만여 호, 작은 나라가 7천 호 가량으로, 3인 가족(노인1 + 부부2 , 아이는 제외)으로 계산할 때, 가구당

인구수를 곱한 실제 인구는 큰 나라가 3만, 작은 나라가 2만 정도이며, 3만 x 9 + 2만 x 12 = 51만이 되어 설명과 같습니다.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약 1백만 정도가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단군조선의 인구였을 듯합니다.

 

▣ 고조선과 고인돌

 한때는 고인돌을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라고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도, 바로 전 시대임에도 고인돌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고구려에서 '대혈(大穴)' 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는 문장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규원사화나 부도지에서도 직접적으로 고인돌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부분을 지적해 봅니다.

 후일 문박씨가 아사달에 거하였는데 그 얼굴은 환하여 젊어 보이고 눈은 모가 나고 제법 단검의 도를 얻었다.

有後 文朴氏 居阿斯達 韶(풍류이름 소)顔方(모 방)瞳 ○得檀儉之道

 그 후 향미산의 영랑과 마한의 신녀 보덕 등은 같은 무늬를 얻어(只得基一斑) 청정무위(淸靜無爲)하였으나

그것은 단조가 만민을 교화시키던 큰 뜻과는 거리가 멀다.

 단군이 아사달에서 신이 되고(化神朝天) 부루가 왕위를 이어 받는 이야기 바로 뒤에 등장하는 글치고는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글이 놓인 위치나 '네모난 눈동자', '단검의 도' 등의 내용으로 보아, 단군을 기념하여 아사달에

고인돌을 세운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그 뒤에 서술된 영랑이나 보덕의 경우도 다른 종류의 고인돌에 대한

설명일 것입니다. 단군조선에서 북방식 고인돌을 세웠다면, 삼한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영랑이나 보덕의 나라에서는 이를

본떴으나 그 모양이 다른 남방식 고인돌을 세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한문에서 등장하는 ‘풍류’ 나 ‘무위’ 는 부도지의 ‘조음’ 과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부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황궁씨가 곧 천산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조음을 울려 ...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쟁취하였다.

 黃穹氏乃入山而化石 長鳴調音 ... 期必大成恢復之誓約成就

 바람이 불 때 ‘붕, 붕’ 소리가 나서 보니 고인돌이 있었다는 얘기는 종종 역사서에 보입니다. 어쩌면 이들 고인돌들은 죽음을

초월하여 후손에게 하늘의 소리를 전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규원사화가 기술하는 단군조선과 삼한의 영토인 한반도와 발해 연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고인돌들의 측정된 연대와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연대가 거의 일치하는 이상, 고인돌은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특징으로 여겨도 될 듯 합니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고인돌은 단군임금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고인돌은 아사달인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삼부인(天符三印)

 단군조선과 신라 건국시 등장하는 '천부삼인' 과, 고려와 조선 건국시 등장하는 금척은 무엇이었을까요 ...

 삼부인은 그 명칭 외에는 어떤 것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무당에 전해지는 물품으로 보아 거울, 방울, 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울 ... 별자리가 새겨진 잘 다듬어진 석판이었을 것이나 후에 청동거울로 대체. 신지씨 일족에 대한 통수권을 상징.

 방울 ... 곡물들의 씨앗이 담긴 작은 방을 연결시켜 묶은 다발이었을 것이나 방울로 대체. 고시씨 일족에 대한 통수권을 상징.

 칼 ... 제사용 돌칼에서 청동검으로 대체. 치우씨 일족에 대한 통수권을 상징.

 금척 ... 황제씨 대에 이루어진 도량형과 음(音)의 통일 과정에서 제작된 청동(또는 황동)피리. 하늘의 원칙을 상징.

 삼부인은 신시씨 이후로 천왕의 상징이었을 것이며, '천명을 받았다'는 것은, 환웅천왕으로부터 삼부인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볼 때, 고시씨는 삼한지역인 한강 이남과 한반도 동쪽, 신지씨는 발해 부근을 제외한 만주 동쪽, 치우씨는

중국 동해안에서 발해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했을 것이나, 단군조선 말기에 회대를 평정하여 그 곳에 자리잡으면서 조선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 같습니다. 솥으로 치면 세 개의 발 중 하나를 잃어 삼부인의 효력을 상실한 단군조선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도 이들 남후를 중심으로 한 치우씨의 후손들이

단군조선이 없어져 삼한과의 교류가 드믈어진 상태에서 청동기에 이어 철기문화를 새로이 발전시켰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단군조선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된 규원사화에서는 ‘홍익인간’ 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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