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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동정(桐井) 원래는 산골 안에 금(金)이 매장된 마을이 있어 古羅金(고라금)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연못가에 오동나무가 있고 그 밑에 있는 바위에 솟는 샘이 있다하여 동정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동정, 신정, 성치가 한 마을이였는데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성치, 신정마을로 분리되었다.
2007.05.14 16:40

상고사 고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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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삼아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단군조선


 어쩌면, 우리는 고조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았는 지도 모릅니다.


▣ 연대표

 
 1세 단군 임금 원년(B.C.2333) 조선 건국. 우수하의 벌판에 도읍을 세우고 임검성(壬儉成)이라 이름함.

 성곽과 궁실을 짓고 여러 관직을 설치. 부루(호가 ; 虎加)는 모든 가(加)를 총괄, 신지씨(마가 ; 馬加)는 생명을 주관,

 고시씨(우가 ; 牛加)는 곡식을 주관, 치우씨(웅가 ; 熊加)는 병사를 주관, 주인씨(학가 ; 鶴加)는 고을을 관리.

 각 가의 명칭으로 보아, 웅가(치우씨 일족)의 아들인 단군은 호가의 왕비를 맞이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도지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성씨(姓)의 시작은 마고 시대의 최초의 네 선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만, 최초의 족보는 이 때에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세 단군 임금 10년 (B.C.2323) 백산의 남쪽 패수 북쪽으로 도읍을 옮겨 평양이라 이름함.

 갑비고차(강화도)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냄.

 삼국사기에 의하면, 패수는 대동강이므로, 이 때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인 듯하며, 후일 물에 잠겨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1세 단군 20년 (B.C.2313) 남이의 환란으로 부여를 파견. 강화 삼랑성을 쌓음.

 규원사화에는 삼랑성을 부여, 부소, 부우가 쌓은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부소, 부우는 단군의 둘째, 셋째 아들입니다.

 성격상 부여씨는 웅가인 치우씨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1세 단군 30년 (B.C.2303) 대홍수. 문화 구월산 아래에 거처.

 문화현 구월산에 있는 사당은 아마도 이 때 단군이 거처하던 곳일 것입니다.

 1세 단군 40년 (B.C.2293) 설유의 난으로 부여를 파견. 부여를 우수홀에, 고시씨를 남쪽에 봉함. 재위 93년.

 규원사화에서 단군의 나이는 210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위년도를 뺀 117세 때에 나라를 세운 셈입니다. 이는 부도지의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임검씨가 ... 여러 종족들을 차례로 방문하니, 백 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때 단군임금은 부도를 세울 것을 약속하고 동북방에 부도를 건설, 단군조선을 일으킵니다. 계산해 보면, 단군임금은 17세일

때부터 종족들을 방문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혁거세가 13세에 왕이 되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2세 부루 즉위 (B.C.2240). 우순의 땅의 정복하여 무리들을 쫓아냄. 재위 34년.

 우순은 순임금을 의미할 것입니다. 부도지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3세 가륵 즉위 (B.C.2206). 하나라 정벌. 재위 51년.

 4세 오사 즉위 (B.C.2155). 북으로 순행하다가 영초(靈草)를 얻음. 천하를 21주로 나눔. 하나라 후상 정벌 실패 후 화해. 재위 49년.

 아마도 우리나라 산삼의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되는 듯 싶습니다.

 5세 구을 즉위 (B.C.2106). 하나라 소강과 화목하게 지냄. 재위 35년.

 6세 달문 즉위 (B.C.2071). 하나라를 물리침. 재위 32년.

 7세 한율 즉위 (B.C.2039). 아질의 난 평정. 재위 25년.

 8세 우서한 즉위 (B.C.2014). 1/90 세금을 걷음. 물자의 유통. 재위 57년.

 9세 아술 즉위 (B.C.1957). 재위 28년.

 10세 노을 즉위 (B.C.1929). 우리를 만들어 짐승을 기름. 재위 23년.

 11세 도해 즉위 (B.C.1906). 설유 평정. 재위 36년.

 12세 아한 즉위 (B.C.1870). 재위 27년.

 13세 흘달 즉위 (B.C.1843). 하나라의 엄에서 빈.기 사이의 지역 정벌 후 화해. 재위 43년.

 14세 고불 즉위 (B.C.1800). 재위 29년.

 15세 벌음 즉위 (B.C.1771). 하나라 멸망. 상나라 탕왕과 화해. 1/80 세금을 걷음. 재위 33년.

 이상시 변호사의 검증에 의하면, 이 연대는 죽서기년에 의한 연대의 은나라 기록과 일치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상나라는

단군조선에 1/80의 세금을 바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상나라는 단군의 제후국으로 출발했다는 것이죠.

 16세 위나 즉위 (B.C.1738). 재위 18년.

 17세 여을 즉위 (B.C.1720). 재위 63년.

 18세 동엄 즉위 (B.C.1657). 앙골.장골의 난 평정. 재위 20년.

 19세 구모소 즉위 (B.C.1637). 재위 25년.

 20세 고홀 즉위 (B.C.1612). 재위 11년.

 21세 소태 즉위 (B.C.1601). 상나라 땅에 군대 파견. 재위 33년.

 22세 색불루 즉위 (B.C.1568). 상나라와 싸워 이기고 화해. 상나라를 치고 국경 안 해대에 주둔, 백성들 이주함. 재위 17년.

 23세 아물 즉위 (B.C.1551). 상나라 땅에 고을을 세움. 재위 19년.

 24세 연나 즉위 (B.C.1532). 상나라 침입 후 싸움과 화해를 반복. 재위 13년.

 25세 솔나 즉위 (B.C.1519). 남.북의 백성들이 배.수레로 교통하게함. 재위 16년.

 짐작입니다만, 여기에서 '남' 은 삼한을, '북' 은 부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6세 추로 즉위 (B.C.1503). 재위 9년.

 27세 두밀 즉위 (B.C.1494). 상나라 정벌. 귀주(鬼州) 평정. 재위 45년.

 28세 해모 즉위 (B.C.1449). 재위 22년.

 29세 마휴 즉위 (B.C.1427). 남이의 바다에서 진흙산이 솟아나왔다. 불이 물 가운데에서 솟았고 진흙이 합하여 돌이 되었다.

재위 9년.

 제주(탐라)의 산일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고려사에 적혀 있습니다.

 목종 5년(1002) 6월 탐라산의 네 구멍이 열려 붉은 물이 솟아 나와 5일 만에 멈추었다. 그 물이 모두 용암이 되었다.

 목종 10년(1007) 탐라에서 서산(瑞山 ; 상서로운 산)이 솟아 대학박사 전공지를 보내어 보게 했는데, ... 전공지가 산 밑에 이르러

그 형상을 그려 가지고 왔다.

 그 묘사가 고려 때와 다르나 용암 분출의 실제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용암이 굳어진 연대는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고려 때를 포함, 수천 년 이내의 분화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기로부터 3백 년 간의 간빙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해저화산의 분화는 빙하기의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30세 나휴 즉위 (B.C.1418). 은나라와 화친. 재위 53년.

 31세 등올 즉위 (B.C.1365). 재위 6년.

 32세 추밀 즉위 (B.C.1359). 재위 8년.

 33세 감물 즉위 (B.C.1351). 재위 9년.

 34세 오루문 즉위 (B.C.1342). 도읍을 낙랑홀로 옮기고 진번후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함. 재위 20년.

 낙랑홀은 최초에 고시씨가 자리잡았던 남동쪽이 됩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 도읍을 옮기고 있습니다. 베트남 해안의 해수면

변화를 참조한다면, 이 시기는 단군 초기부터 상승되었던 해수면이 원래의 높이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35세 사벌 즉위 (B.C.1322). 재위 11년.

 36세 매륵 즉위 (B.C.1311). 재위 18년.

 37세 마물 즉위 (B.C.1293). 남쪽으로 순행하여 당장경에 이르러 아사달에서 붕어하였다. 재위 8년.

 마물 임금 까지가 1048년이 됩니다.

 38세 다물 즉위 (B.C.1285). 알유를 물리침. 재위 19년.

 같은 나라인 지는 모르겠지만, 설유의 나라도 1천 년을 넘는군요. 이 때도 일시적인 홍수의 시기에 해당됩니다.

 39세 두홀 즉위 (B.C.1266). 재위 28년.

 40세 달음 즉위 (B.C.1238). 재위 14년.

 41세 음차 즉위 (B.C.1224). 재위 19년.

 42세 을우지 즉위 (B.C.1205). 재위 9년.

 43세 물리 즉위 (B.C.1196). 남후 검달이 은나라를 정벌, 제후들의 회대의 땅을 평정. 은나라 쇠퇴. 재위 15년.

 해안가가 넓어지면서 중국을 칠 수 있는 여건이 확보되었을 것입니다만, 제후들이 멀어지고 세력이 커진다는 것은 이들이 독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겠죠. 또한, 일시적으로 열렸던 문은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서서히 닫히게 됩니다.

 44세 구홀 즉위 (B.C.1181). 재위 7년.

 45세 여루 즉위 (B.C.1174). 남후가 선모국을 세움. 재위 5년.

 제후국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추측입니다만, 여루왕의 제위기간이 짧은 것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46세 보을 즉위 (B.C.1169). 남후가 제후들을 총괄. 재위 11년.

 47세 고열가 즉위 (B.C.1158).

 47세 고열가 30년(B.C.1128). 당장경으로 거처를 피하여 아사달에 자리잡음 (고조선 소멸). 재위 30년.

 단군왕검으로부터 고열가까지 단군조선 총 1205 년.

 마지막 70년 간은 세금을 바치던 제후국들이 떨어져나가 스스로 통치를 포기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마지막 왕의 명칭이

'가(加)'로 끝나는 것은, 임금이 아닌 제후의 신분임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부도지에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읍루씨가 ...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리가 사단(詐端)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하며 백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유중이 통곡하였다.

 그렇다면, 읍루씨가 고열가(古列加)가 되는 것일까요 ... 어쩌면 47대 임금이 아닌, 37대 임금인 마물(麻勿)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고조선의 통치 기간인 1048년과 맞춰 보면, 정확히 단군왕검으로부터 37세 마물 임금까지가 됩니다.

또한, 마물 임금의 기록에도 당장경과 아사달이 등장합니다.

 38대 다물 임금 이후로는 제후에 대한 통치행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강한 제후가 나머지 제후국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천부가 제후들에 대한 통치를 의미한다면, 읍루씨는 마물 임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단군 조선은 37대, 1048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명맥은 유지되어 왔기에, 기자 조선이 단군 조선을 계승했다고 여겨지는 것과 같이 단군 조선은

이후로도 계속된 것으로 기록되는 듯 합니다. 마물 임금으로부터 약 1백 년 후, 남후가 은나라를 치고 제후국을 세우게 됩니다.

 기자조선도 남후나 제후국으로부터 왔을 것으로 생각되며, 천부를 계승하지 않은 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한다면, 그 기간은

B.C.1185 ~ B.C.103 의 1082 년 간이 됩니다.

 '다물' 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편에도 등장하는 낯익은 단어입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1048 년 간의 통치기간은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사서의 기록과 거의 비슷합니다.


 단군조선 멸망의 원인은 인위적인 것 보다는 자연 환경의 변화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의 유민이었을 기자는 고열가가 물러나자 단군조선의 옛 땅에 도읍을 세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만조선 멸망 후로부터 신라의 건국까지에도 또한 50년 남짓한 공백기간이 존재합니다.

 만일 한사군이 신라.고구려.백제의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들 나라의 건국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사군의 위치는

단군 고열가 때의 고조선의 영역인 평안도에서 유주까지 이르는 배로 교통이 가능한 연안지방이었을 것입니다.


 기자조선 건국 (B.C.1103 년 경 ; 무진년 당요 건국 후 1230년 경과).

 조선왕조 실록에 단군조선에서 기자책봉의 시기는 10 년 단위로 계산하면서도 기자조선은 단지 1천 년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계산 대로라면, 위만조선을 기자조선에 포함시키면 정확히 1천 년이 됩니다. 또한, 1천 년이라고 했던 신라도 총 992 년입니다.

 위만조선은 B.C.198 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B.C.100 년은 준왕을 이은 무강왕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규원사화의 단군조선 연대에 대한 고찰1

단군조선의 47대 임금을 비롯한 이름들을 살펴 보기로 합니다.

가차문자라면 원래의 의미를 알기 어렵겠지만, 나열된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형제 사이에는 돌림자를 사용하였다.

② 끝자로 매 200년 마다 구분하였다.

③ 끝자로 매 600년 마다 구분하였다.

 

단군 왕검의 아들들은 그 이름이 부루, 부소, 부우, 부여였습니다.  연나와 솔나, 마휴와 나휴, 마물과 다물 등

같은 끝자가 이어진 것은 모두 형제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입니다. 또한, 난을 일으킨 앙골과 장골의 형제도 있습니다.

이러한 끝자에는 임금에만 해당되는 듯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는 임금의 이름이 각 시대를 대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군으로부터 구을, 노을, 여을의 시대를 살펴보면, 각각 2백 년씩 차이가 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물, 감물, 보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을(乙)’, ‘물(勿)’은 각 시대를 200년 간격으로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을’과 ‘물’의 차이점을 살펴봅니다.

‘여을’은 나라가 세워진 후 600년에 해당되며 이후로는 다시 600년 간에 걸쳐 ‘물’이 계속됩니다.

600년은 10갑자에 해당됩니다. 태양과 달을 기준으로 한 태양태음력은 12달을 1년으로 하기 때문에 손가락의 갯수를 함께

고려하여 60년의 단위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물’에서 계속된 돌림자는 ‘을’로 끝나고 있습니다.

첫 600년의 마지막 임금인 여을 임금은 제후들을 모으고 진번후에 상을 내렸습니다.

이 모임은 6백 년 간에 대한 평가와 계속 다스릴 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이로부터 다시

600년이 계속됩니다. 도읍지 또한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겨집니다.

두 번째 600년의 시기에 마물 임금이 중간에 등장하는데, 이 때에 단군조선은 1,048년 간의 치세가 끝납니다. 하지만,

다물 임금이 제가에 대한 통수권과 영토를 다시 찾으려 했고, 단군조선은 당분간 계속되다가 고열가 임금으로 다시

600년을 채우고 단군조선의 치세가 끝을 맺습니다.

고열가의 명칭이 ‘가(加)’로 끝나고 있는 것은 임금이 아닌 제후의 신분으로 나라를 다스렸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러한 규칙이 신시 1만 1천 년 간의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1,200년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면,

10,800년도 같은 방법으로 계산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고조선의 과학기술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고조선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추측이 가능할 뿐입니다.

 * 건축술 ... 궁성과 제단을 축조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참성단으로 보아 삼국시대와 큰 차이 없는 건축기술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 천문관측기술 ... 조선 초 세종 때 만든 혼천의는 순임금이 만든 선기옥형을 다시 살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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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실록에도 엄연히 나와 있으며, 요.순의 이름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을 비롯한 많은 글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종 시대의 집현전은 주로 주(周)나라 시대의 제도를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주나라 때라면 고조선 말기에 해당합니다.

 예악, 도량형, 과학기술, 의식절차 등 많은 것들이 옛 법을 따랐으며, 태조 ~ 성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의 기틀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다져지게 됩니다.

 다음은 세종실록의 기록입니다.

 옛일이 이미 멀어서 제도가 퇴폐하여졌으니 책에 실려 있은 들 그 뜻을 뉘가 알리오.

 신성하신 임금이 시대에 응해 나셔서, 요.순의 법을 받아 표(表)와 누(漏)와 의(儀)와 상(象)의 옛제도를 회복했네.

 ... 요가 희화에게 명하여 책력에 일월성신을 형성하고, 순은 선기옥형을 만들어 칠정을 바로잡았으니 ...

 위의 글에서, 표는 수표, 누는 물시계, 의와 상은 별의 관측을 위한 장비로 보입니다. 혼천의의 경우, 하늘의 축에 의해

바퀴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365 1/4의 눈금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레는 물론이고, 혼천의와 유사한 장비를 별의 관측에

사용할 정도라면, 금속을 다루는 기술과 도자기 기술을 제외하고는 조선 초 세종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도지에서는 '자방(磁方)' 을 이용하여 도읍을 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방향의 측정에 자석을 이용했다는

것이죠. 당시의 자북은 북동쪽이었다고 합니다만, 자북이 규칙적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 확인할 길이 없네요.

 실제로, 한 때 융성했다가 시절이 지나면서 오히려 쇠퇴하는 기술들도 수없이 있습니다. 세종 때 발전된 의학, 천문학의 경우,

중국에서는 오히려 쇠퇴하여 일부 서적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다시 중국으로 수입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모습 또한, 몇 가지는 빠져 있다고 해도, 풍부한 목재가 있었고, 국민들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문화가

풍요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면, 고조선 시대는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됩니다. 주나라 이전의 고조선은 은을

제압했으므로,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어쩌면, 조선 초에 이토록 '요.순 임금'이 등장하는 것은, 실제는 단군조선의 문화를

되살리면서 중국의 시선을 의식해 이들을 내세웠던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중국에서도 한나라 이전의 잊혀진 시절의

제도였으니까요.

 

▣ 고조선 시대의 의복

 규원사화에 의하면, 옷을 입게 된 것은 태호 복희씨 때부터라고 합니다. 발굴 유적으로 볼 때에도, 우리나라의 바느질은

신석기 시대 (B.C.6,000) 때 부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발굴이 되지 않았어도 최초로 바느질한 옷은 중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1만 5천년 전 쯤으로 보아도 될 듯합니다. (http://synnic.com.ne.kr/upper_paleolithic9.htm)

 신라의 경우, 진덕여왕 이전까지는 동이의 의복을 따랐다고 합니다. 후일 송나라에서 여악공의 옷을 보고 '삼대의 복색인데,

아직도 입는 지 몰랐다.' 라고 한 것은, 하.은.주 시대에도 삼국시대의 복장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고인돌에서 떠올리는 고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상상과는 달리, 일반의 복장을 갖춘 삼국 시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위의 글을 다시 읽어 보면, 동이의 의복인데 하.은.주 사람들이 따라 입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라 사람은 제대로된 옷을 입고 사는데, 인접해 있고, 모자를 쓰고 큰 활을 메고 다닌다는 고조선 사람이 가죽옷과 풀옷만

걸치고 살았을까요 ... 게다가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기는 은나라 말기에 해당됩니다. 또한, 기록대로라면,

기자조선은 은.주나라의 문화에 연접해 있었습니다.)

 악공은 활수의(넓은 소매옷)와 색사대(색실 허리띠), 대군(큰치마)를 입었었다고 하네요.

 고시씨 후손은 ... 백성들이 모두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고 살았다. ... 관대와 의복을 입고 신발을 신는 예를 제법 갖추었다.

 ... 규원사화 단군기

 

▣ 단군조선 시대의 관직 (규원사화)

 부여의 제도가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규원사화에 의하면, 고조선 초기에는 단군팔가가 있었습니다.

 호가(虎加) ... 모든 가를 총괄. >>용가(龍加)로 바뀜.

 마가(馬加) ... 신지씨. 명령을 주관.

 우가(牛加) ... 고시씨. 곡식을 주관.

 웅가(熊加) ... 치우씨. 군사를 주관.

 응가(鷹加) ... 형벌을 주관.

 노가(鷺加 ; 해오라기) ... 질병을 주관. >>녹가(鹿加)로 바뀜.

 학가(鶴加) ... 주인씨. 선악을 주관.

 구가(狗加) ... 모든 고을을 나누어 다스림.

 봉가(鳳加) ... 2세 부루 때 추가됨. 재정을 담당.

 다음은 부도지의 내용입니다.

 이에 임검씨가 ... 유인씨의 후손 유호씨 부자에게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등 백여 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환부와 권사가 직책인지 이름인 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단군조선의 제도는 기자조선을 넘어 마가, 저가, 구가와 같은 부여로 계승되었습니다. 부여는 농업과 목축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 단군조선의 제천행사 및 의식

 태백산 ... 단군 왕검 초기에 성과 궁궐을 쌓은 후, 단군팔가들이 흰 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이후 순행시 제사.

 평양 ... 단군 10년 하늘에 제사.

 갑비고차 ... 산에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 이후 순행시 제사.

 숙신홀 ... 북동쪽 제후들을 모아 신지씨의 영에 제사. 숙사달에 사당을 세움.

 엄려홀 ... 남서쪽 제후들을 모아 치우씨의 영에 제사. 엄려달에 사당을 세움.

 낙랑홀 ... 남동쪽 제후들을 모아 고시씨의 영에 제사. 소루달에 사당을 세움.

 (소루달 ... 어쩌면, 솔달이 되어, 소나무가 우거진 남산과 관련 '목멱양' 으로 불리었던 서울이 아니었을까요 ...)

 나라 안 ... 일월.음양.사시의 신과 산악.하천.이사(里社)를 주관하는 신에 제사.

 10월 제사 ... 2세 부루 때 천하에 명령을 내려 초겨울 10월 추수가 끝난 후에 백성들이 서로 모여 새 곡식으로 하늘에 제사드리고

 더불어 단군왕검과 하늘의 신에도 제사드리게 했다.

 부여, 고구려, 동예, 신라 등 동방의 10월 제사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다음은 부도지의 내용입니다.

 ...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드시 신시(神市)를 여니, 이에 말과 글이 같은 수레바퀴로 돌아가고 천하의 기준이 하나로 되어

사람들이 크게 화합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을 지어 천부를 높이 받들었다.

 ... 종족들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 변하여 서로 달라져,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하는 자리에서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후일의 회강(會講 ; 모여서 강론함)의 실마리가 되었다.

 ... 조시(朝市)와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 조제(朝祭)를 지내니, 사해의 종족들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 이를 가리켜 조선제(朝鮮際)라 하였다.

 

▣ 조선의 명칭

 위의 부도지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조선’ 의 ‘선’은 피를 신선하게 하는 제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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