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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s jang2016.01.28 08:28

◈소록도 두수녀의 감동적인 이야기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날은 지난달 21일이었습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편지에서“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한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는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되어 살아 왔는데,지금은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서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은 베품이 

참 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건너의 섬에는 두 성녀가 다녀가신 곳인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보살핀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님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 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습니다.

지금 수도원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2003년 전후경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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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스북의 창설자

저커버그는 독실한 불자라지요?

그는 선 수행자였던 스티브 잡스나

수도자와 스님들처럼

매일 같은 옷을 입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이 세계적인 젊은 부자가 ....

딸 맥스가 태어난 후 2개월간 육아휴직을 했던 마크 저커버그가 업무에 복귀하면서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라며 옷장을 공개했다.

 

저커버그는 26일(현지시간) 페이스북 계정에 옷장 사진을 올리고 

"부성휴가(paternity leave)가 끝난 후 복귀 첫날입니다. 뭘 입어야 할까요?"라는 글을 남겼다.

 

사진에 찍힌 옷장에는 옅은 회색 반팔 티셔츠 9벌과 푸른 빛이 도는 짙은 회색이 섞인 

후디 6벌이 옷걸이에 일렬로 걸려 있었다.

 

그는 게시물에 따라붙는 감정 상태 표시로 "결정하지 못했어요"를 골랐다.

 

이에 대해 셰릴 샌드버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업무 복귀를 환영해요

마크! 맥스가 당신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니 참 행운이죠. 

우리는 당신이 사무실에 다시 와서 무척 기쁩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저커버그는 공개석상에 똑같은 모양의 회색 티셔츠와 후디를 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작년 10월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사용자들과 공개 질의응답을 하면서 

"왜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이 공동체를 가장 잘 섬기는 것 

외에는 해야 할 결정의 수를 될 수 있는대로 줄이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한 바 있다.

 

한편,블룸버그가 지난해 말 공개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저커버그의 재산은 456억 달러(약 54조원)으로 세계 8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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